이어폰을 끼고 귀를 기울인다.곧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가 눈에 그려진다. 고요한 사무실에선 무심한 타자소리만 울려 퍼진다. 윤병임(53·승전 속기사무소) 속기사는 19년째 수원지역에서 속기사로 활동중이다.

광고 속 속기사가 마냥 멋져 보여 일을 시작했다. 30대라는 비교적 늦은 나이에 속기사가 됐지만 그만큼 열심히 달려왔다.

확정판결의 사실인정 오류를 바로잡기 위해 다시 재판하는 '재심'사건을 맡은 뒤 자진해서 한 달간 무료로 속기 업무를 보기도 하고, 의뢰인 반대측 집단으로부터 협박을 받으면서도 꿋꿋이 제 역할을 해냈다.

윤 속기사는 욕설이 담긴 녹취를 워낙 많이 듣기 때문에 '속기사는 욕을 먹고 사는 직업'이라고 말하면서도, 표정에는 자부심이 넘쳤다.

그는 의뢰인들이 사무실에 오기 전까지는 힘들더라도, 자신과 대화를 나누고 사무실을 떠날 때 만큼은 발걸음이 가벼워졌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매일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를 열고 있는 그를 만났다. 이번엔 역할을 바꿔 윤 속기사의 목소리를 들어봤다. 
 

―'속기사', 다소 생소한 직업이에요.
"'속기'라는 뜻처럼 다른 사람의 말을 신속하고 정확하게 기록하는 사람들이에요. 속기사가 활동하는 곳은 가끔 영화에도 나오는 법원이 있어요. 국회나 국방부도 있고요. 저처럼 이렇게 사무소에 일하는 속기사도 있지요. 법원처럼 기관에 있는 속기사는 매뉴얼에 따라 일을 해요. 재판 내용을 기록하고 정해진 업무를 하는 거죠. 반면, 사무소에 있는 속기사들은 매뉴얼이 없어요. 워낙 다양한 의뢰인이 오기 때문에 매번 하는 일도 달라지죠. 사람들은 속기사가 귀가 밝아서 모든 말을 다 알아들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말이란 게 정말 어려워요. 속기사의 귀가 '소머즈'도 아니고요. 그래서 가끔 말을 알아듣지 못할 땐 '속기사가 그것도 못 알아듣냐'는 핀잔을 받기도 하죠.방언도 변수에요. 저는 속기사 일을 시작하면서 처음으로 제주 방언을 들었어요. 그런데 아무리 들어도 무슨 말인지 정말 모르겠는 거예요. 결국 의뢰인을 옆에 앉히고 방언 공부를 하면서 속기를 한 적도 있어요. 속기사무소를 차리고 처음 찾아온 의뢰인은 경상도 분이었어요. 경상도라고 하면 고등학교 때 수학여행으로 경주 불국사에 가본 게 다였죠. 역시나 무슨 말인지 몰라 한참을 헤맸어요. 속기사는 전자기기의 역사와 함께 하는 사람들이기도 해요. 녹음기기의 변화에 따라 일하는 환경도 계속 바뀌거든요. 제가 속기사에 입문했을 땐 카세트 테이프 시대였어요. 지금이야 휴대전화로 녹음하거나 고가의 녹음기를 사용하지만요. 집에 있는 일반 전화기에도 녹음 기능이 있었어요. 어느 날은 의뢰인이 보따리를 한아름 싸들고 사무소로 들어오더라고요.알고 보니 전화기에 중요한 녹음이 돼 있는데, 덩그러니 전화기만 들고 오면 파일이 삭제된다고 생각하시고 보자기로 여러 겹 싸서 온 거였죠. 또 비디오 테이프를 갖고 와서 속기해 달라는 의뢰인도 있었어요. 재생하려면 TV가 필요했기 때문에 의뢰인이 직접 TV를 갖고 사무소로 온 적도 있죠."

기사를 하게 된 계기가 궁금해요.
"신문에서 우연히 속기사 학원 광고를 봤는데 멋져 보였어요. 정장을 입고 속기용 키보드 가방을 들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죠. 문구도 기억에 남아요. '1시간에 35만 원'을 벌 수 있다고 써 있었거든요. 저는 당시 기아자동차에서 리포터를 하며 글을 쓰고 있었기 때문에 같은 글쓰기라면 곧잘 할 수 있겠다 싶었죠. 또 속기사로서 전문직으로 살고 싶기도 했어요. 저희 7남매 가족은 어렸을 적부터 너무 가난했어요. 그래도 힘들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어요. 항상 꿈이 있었죠. 전문직을 가지면 제 자식들이 꿈을 꾸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았어요. 마침 속기를 배우는 친구도 있었고요. 무작정 시작했죠. 결국 1997년에 속기를 접하고 2년 뒤에 합격했어요." 

―사용 중인 속기용 키보드가 꽤 오래된 제품 같아요.
"속기사를 시작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사용했으니 20년 넘게 함께 한 키보드죠. 요즘엔 정말 좋은 제품이 많이 나와요. 하지만 저는 이 키보드가 좋아요.실기 시험 때도, 처음 속기사무소를 열었을 때도 모두 이 키보드를 사용했어요. 이 키보드는 특히 소중해요. 당시 저는 직업이 없었고, 남편은 기아자동차를 다니고 있었지만 부도가 나서 월급이 나오지 않았어요. 그래서 시어머니가 시골에서 콩 팔고 팥 팔아 매달 50만 원씩 보내주셨죠. 그 돈을 모아서 80만 원을 주고 산 키보드에요.저를 예뻐해주시던 시어머니는 작년에 돌아가셨어요. 그래서 제게는 더욱 의미있는 키보드죠.속기용 키보드는 일반 키보드와 조금 달라요. 약자가 입력돼 있어서 바로 단어가 입력되죠. '국민'이라는 단어를 입력한다면 일반 키보드로는 'ㄱ', 'ㅜ', 'ㄱ' 등 일일히 모두 입력해야 하잖아요. 하지만 속기용은 이미 지정된 단어가 있어서 자판 하나만 눌러도 '국민'이라는 단어가 바로 입력돼요."
 

―잊지 못할 사건이 있나요.
"2007년 발생한 '수원 노숙소녀 살인사건'이요. 당시 수원의 한 고등학교에서 10대 노숙소녀가 숨진 채 발견됐어요.경찰은 가출청소년 5명을 범인으로 지목했고 이들은 징역형을 선고받았죠. 하지만 추후 재심에서 모두 무죄가 나왔어요. '재심 변호사'로 유명한 박준영 변호사님이 무죄로 이끌어낸 건데요. 저는 사건 이전부터 박 변호사님과 가깝게 알고 지냈어요. 하루는 박 변호사님과 통화를 하는데 그 아이들이 절대 범인이 아니라고 하시더라고요.무죄를 다투겠다고 헀죠. 수임료는 받지 않는다고 했어요. 얘기를 나눠 보니 20시간 분량의 검찰 진술녹화영상을 속기해야 한다더라고요. 박 변호사님이 무료로 5명을 변호하는 것도 힘들 텐데 속기비용까지 혼자 부담하기엔 너무 무리이지 않을까 싶었어요. 그래서 그냥 녹취는 제가 맡겠다고 했어요. 물론 무료로요. 아마 한 달정도는 진술녹화영상만 풀어낸 것 같아요. 다행히 그 친구들은 무죄판결을 받았어요. 시간이 흐른 뒤에 한 청소년센터에서 무죄를 받은 친구들과 함께 제 사무실로 찾아왔어요.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려고요. 그래서 저는 그저 사회에서 건강하게 자랐으면 좋겠다고 말했어요. 그 사건을 맡으면서 가족의 소중함, 사회시스템의 문제 등 제가 배운 게 더 많아요. 유독 기억에 남네요. 또 출장 속기를 간 적도 있어요. 재건축과 관련한 총회 자리였죠. 저는 그 자리에서 오고 가는 말을 모두 기록해야 했어요.조합 측이 의뢰를 한 건데 검은 양복을 입은 덩치 큰 분들도 섭외했더라고요. 저와 속기록이 담긴 노트북을 보호하기 위해서였죠. 그러다 보니 제가 화장실을 갈 때마다 경호원들이 저를 에워싸고 따라다니기도 했어요. 그도 그럴 것이 상대방 측에서 저를 법원에서 보자는 둥 협박하며 분위기가 험악했거든요. 그래도 저는 누구 편을 드는 게 아니라 그저 할 일을 한 거였죠. 기억에 남는 사건이 아직도 많아요."

―속기사에게 중요한 덕목이 있을까요.
"엉덩이가 무거워야 돼요. 오랫동안 앉아서 속기를 풀어야 하기 때문에 집중력이 있어야 하죠.글자 하나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지기 때문에 꼼꼼하고 정확하게 표기해야 합니다. 평소에 공부도 계속 해야 하죠. 단어를 알아듣지 못하면 일이 안 되니까요. 속기사무소에는 여러 계층의 의뢰인이 찾아오고, 속기사는 그 상황에 따라 적절한 단어와 표현을 통해 공감을 줘야 해요. 그러려면 역시 공부죠. 심지어 저는 속기사가 되기 전까지 워드파일을 쓸 줄 몰랐어요. 의뢰인들이 표도 만들어 달라하고, 이미지도 삽입해 달라고 하는데 도통 뭘 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그래도 어쩔 수 없죠. 모르는 건 배우고 해내야죠. 반강제로 배운 탓에 지금은 문제가 없습니다. 또 속기사는 하나의 서비스직이기도 해요. 저는 늘 정장을 입고 화려하게 꾸미지도 않아요. 단정하고 깔끔한 모습으로 의뢰인에게 신뢰감을 줘야 한다고 생각하니까요."

―인공지능이 속기사를 대체할 거라는 주장도 나와요.
"제 생각은 조금 달라요. 인공지능이 사람처럼 소리를 인식할 수는 있겠죠. 하지만 그 숨은 뜻까지 이해하긴 어렵지 않을까요.일을 하다 보면 정말 여러 의뢰가 들어와요.노래방 안에서 있었던 상황을 녹취한 파일이 와도 원하는 내용이 각기 달라요. 시끄러운 노래가 나오는 상황에서 녹취에 등장하는 두 사람이 나눈 대화 내용을 속기해 달라고 하죠. 아니면 노래방에서 당시 흘러나오던 노래가 어떤 노래였는지 속기해 달라는 의뢰도 있어요. 아예 음성 속 누군가가 헛기침을 한 사실만 확인해 달라는 경우도 있어요. 이게 빗소리가 맞는지 의뢰하기도 하고요. 주로 민감한 사건과 관련된 분들이 의뢰하기 때문에 작은 단서도 주요 증거로 작용하죠. 하지만 인공지능은 이런 소리나 의미들을 어떻게 기록할 수 있을까요. 인공지능이 사람을 대체할 수 없는 이유죠."

―속기사님의 꿈은 무엇인가요.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는 강의를 하고 싶어요. 저도 어린 시절부터 힘들게 자랐잖아요. 속기사도 늦은 나이에 시작했고요. 그래도 20년 가까이 이렇게 잘 지내고 있습니다. 저는 속기사 일을 하기 전까지는 흑백논리에 사로잡혀 있었어요. 좋거나 나쁘거나였죠. 하지만 이 일을 하면서 세상에는 회색도 있고, 빨간색도 있고 노란색도 있다는 걸 알게 됐어요.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제 가치관도 변한 거죠. 지금껏 쌓아온 이야기들을 또다른 누군가에게 전하고 싶어요. 저도 꿈을 이루고 매일 새로운 세상을 보고 있는데, 다른 분들은 저보다 더 많이 배우고 성장할 수 있지 않을까요."

취재=정성욱기자
사진=노민규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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