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3월 6일부터 12일까지 덴마크 코펜하겐의 거리는 세계 각국 정상들의 차량으로 정체가 있을 정도였다. 각 호텔은 웬만하면 대통령, 총리, 장관 및 수행원들인 이용객들로 붐볐다.

덴마크 코펜하겐 유엔 사회개발정상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세계 110여개국의 정상들이 모였기 때문이다. 이들은 시간다툼을 하며 이해관계가 얽혀있는 상대 국가 정상을 찾아다녔다. 때로는 담판으로, 때로는 협조를 구하며 자국의 이익을 위해 뛰었다. 한꺼번에 같은 장소에서 세계의 정상들을 만나 자신들의 현안들을 풀기 위한 흔치 않은 외교적 기회이기에 시간을 허비할 수 없었다.

더욱이 겉으론 웃지만 속으론 비수를 감추고 있는 다자간 국제 정상회의에서 친구와 앙숙은 극명하게 구별되며, 새로운 친구를 얻고 앙숙을 따돌리려는 자국의 이익을 위한 소리 없는 전투가 국가의 명운을 결정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전장에 고독하게 홀로 던져진 정상들은 어떤 심정일까? 그 중압감은 그 어떤 무게로도 설명할 수 없을 것 같다.

이러한 외교의 장에서, 그것도 국익을 위한 정상외교의 절호의 기회에서 역시 영어는 소통의 꽃이고 협상의 무기였다. 다자간 국제회의에서 공식 언어는 대부분 영어다. 즉 영어로 회의가 진행된다.

영어가 안되면 한 템포 늦게 이해가 되고 말맛과 언중의 유골을 발견해 내기가 쉽지 않다. 회의 전, 회의 후, 혹은 휴식 시간에 정상끼리의 중요한 외교적 밀담이나 농담, 혹은 은밀한 사담도 혹(통역관)을 붙이고서는 정겹게, 심각하게 소통할 수 없다. 의미 전달 외에 어떤 감흥도 주기 쉽지 않다. 한 박자 늦은 파안대소가 오히려 뻘쭘한 분위기를 만들어 낼 수 있다.

그런데 사실 중요한 해결은 막전, 막후에서 이루어지는 경우가 훨씬 많다. 정상들도 인간인지라 인간적 친소관계가 있다. 떡 하나 더 주고 싶은 마음이 작용하게 된다. 관계의 거리가 중요한 결심에 전부는 아니지만 비타민적 요소로 작용을 한다. 그 고리가 영어다. 영국의 토니 블레어 총리는 실리외교를 위해 ‘부시의 푸들’이라는 비아냥을 들었지만, ‘푸들’도 영어로 통하였기에 가능했다.

치열한 국제 정상외교의 한가운데서, 우리나라, 중국, 일본 정상들의 공통점은 통역 이어폰을 낀다는 것이다. 물론 영어를 잘하더라도 공식회의에서 자국의 언어를 우선하는 것은 관례다. 그런데 상대적으로 다른 국가들에 비해 영어 구사가 능숙하지 못한 것 또한 사실이다. 당연하다. 문화적 차이와 역사적 배경이 다르기 때문이다. 또한 영어의 능숙 정도가 지도자의 자질을 가늠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현실적 세계흐름에서 볼 때, 당연하다 하기에는 아쉽다. 더욱 특히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국가운명의 사활을 건 전세계적 외교역량을 발휘해야 하는 우리나라 지도자에게 향후 더욱 절실히 요구되는 자질이다.

정상환 국제대 교수, 전 청와대 행정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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