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활유에 유(油)자는 기름이다. 영어로 오일(oil)이다. 매우 미끈거려서 맞닿은 부분의 마찰을 줄이는데 아주 좋다. 차량에는 수많은 금속 부품들이 서로 맞물려 움직인다. 엔진에서 연료가 폭발할 때 열과 금속들이 회전하면서 발생하는 열을 식혀주는 것도 윤활유다. 이밖에 금속들이 잘 돌아갈 수 있도록 한다. 금속표면에 마모(磨耗)가 덜 발생하도록 보호제가 된다. 요즘 한?일 관계가 뻑뻑하고 쇳소리가 난다. 윤활유가 필요하다. 예전과 달리 심상치가 않다. 도가 지나쳐 폭발직전이다. 럭비공 튀듯이 어디로 굴러갈지 모를 형국이다. 일본의 경제보복으로 세계경제 3위의 일본과 수출 6위의 한국이 최악의 격랑에 휩싸였다. 일본이 반도체?디스플레이 소재 수출규제에 나섰다. 반도체는 대외의존도가 높은 한국경제에서 최대수출품목이 아닌가. 반도체 단일 품목으로 수출액이 20세기말 한국수출액과 맞먹을 정도로 비중이 크다. 오죽하면 청와대에서 30대 기업 총수를 부르는 자리도 물리치고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일본으로 달려갔을까. 정치인은 급할 게 없어도 기업은 사활(死活)이 달린 문제다. 바닥나는 소재와 원료를 확보하는 일이 더 급하기 때문이다. 국가 충돌의 피해자는 제 일차로 기업이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기업들은 외교 문제가 경제 문제로 번진 상황을 부담스러워 한다. 부품 소재산업 국산화나 수입처 다변화는 당연히 노력해야 할 일이다.

일본 아베정부는 뭘 믿는 것일까. 트럼프-아베의 신뢰관계로 탈아입미(脫亞入美)로 불릴 만큼 미국의 인도-태평양 구상에 적극 가담하여 미국-일본-인도-호주로 이어지는 미일협조체제를 등에 업고 한국공격에 나선 것인가. 정녕 간단치 않다. 저토록 도 넘은 공세로 일본이 정색을 하고 우리를 때리겠다고 나오면 그걸 막을 방패는 있는가. 아니면 역공할 몽둥이라도 있는 것인가. 예나 지금이나 계속 당하고도 우리는 일본의 속내를 잘 모른다. 일본을 제대로 공부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큰소리만 친다. 흥분할 줄만 알지 대비는 하지 못하는 우리의 자세가 정말 통탄스럽다. 대법원의 강제징용 배상 판결에 따른 외교 갈등으로 촉발된 ‘한국 때리기’ 공세를 풀어갈 윤활유가 필요하다. 사태를 이성적으로 풀어보려는 양국 국민의 노력에 찬물을 끼얹는 억지주장이나 막말, 모욕적 발언은 자제해야 한다.

우린 경제보복으로 일본여행을 취소하는데 일본 지벤학원 50여명 학생들이 45년째 수학여행을 왔다. “한일관계가 좋지 않지만,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 한 예정대로 방문할 계획이었다”며 “정치적 상황과 상관없이 역사교육은 이어져야 한다”고 말했다. 지벤학원 이사장은 그의 선친의 유지를 받아 “일본문화의 원류는 신라와 백제’라는 것을 학생들에게 가르치기 위해 수학여행단을 그간 2만1000여명이 다녀갔다”고 밝혔다. 내년에도 변함없이 한국을 방문할 것이라고 말했다. 오는 26일 예정대로 일본 사이타마 적십자 방문단이 경기적십자사를 3박4일 일정으로 인도주의 사업과 재난구호봉사 상호교류를 위해 방문한다. 12년째 이어온 적십자봉사원과 청소년적십자단원 간의 교류다. 한국노총 위원장이 오랜 우호관계를 갖고 있는 일본노동조합총연합회장과 지난 11일 일본 도쿄 일본노총 본부에서 긴급회담을 가졌다. 한국노총의 요청에 회답한 결과다. ‘한?일간 무역문제가 양국 경제뿐 아니라 노동자에게 악영향을 미칠 것을 우려하며 두 정부가 협의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는 등의 내용을 담은 4개항의 합의문에 서명했다. 일본노총 측은 이 합의문을 일본 경제산업성 등에 전달하고 문제 해결을 촉구할 방침인 것으로 알려졌다. 한일의원연맹은 활동을 멈춘 조직인가. 뻔질나게 나라 밖으로 다니며 분주하게 의원외교를 펼친 외교통 의원들은 어디로 다 갔나. 일본의 경제 보복조치로 한?일관계가 최악의 상황이다. 이들이 한?일간 윤활유가 되어야 할 것 아닌가. 홍석현 한반도평화만들기 재단 이사장은 “문재인 대통령은 설사 내키지 않더라도 늦기 전에 아베 신조 일본총리를 만나 허심탄회하게 대화하고 풀어야 한다.”며 “정부는 모든 역량을 동원해서 두 정상이 만날 수 있도록 여건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더 이상 기업과 국민이 불안하지 않게 일본을 움직여야 한다. 한국기업에 심각한 타격을 입히는 아베 총리의 행동은 국제규범에도 맞지 않고 지혜롭지 못하다. 한?일간에 고도의 전문성과 경험을 갖춘 윤활유가 절박한 때다.

김훈동 대한적십자사 경기도지사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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