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김씨의 발복지로 유명한 여흥민씨 묘는 전남 장성군 북이면 달성리 351-1(돗재로 207-19)에 있다. 전남 장성은 지금은 홍길동의 고장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렇지만 예전에는 선비의 고장으로 더욱 유명했다. 하서 김인후를 비롯하여 퇴계와 사단칠정논변으로 유명한 고봉 기대승, 조선의 마지막 유학 거장으로 평가되는 노사 기정진 등이 활동했기 때문이다. 조선 후기 흥선대원군은 문불여장성(文不如長城)이라 하여 학문으로는 장성만한 곳이 없다고 평가하였다.

호남에는 많은 명문가들이 있다. 이중 울산김씨는 두 번째 가라면 서러워하는 가문이다. 여러 요인들이 있겠지만 풍수가에서는 여흥민씨 할머니 묘 발복 때문으로 보고 있다. 후손들 역시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 묘역 입구에 있는 정화비를 보면 할머니가 친히 이곳에 터를 잡으면서 말 탄 자손들이 가득할 것이라고 했는데, 과연 그 말대로 5대손에서 하서 김인후를 비롯하여 많은 인물이 배출되었다.

여흥민씨는 태종의 왕비 원경왕후의 사촌언니로 하소부인으로 불리었다. 평소에 학문을 좋아했는데 특히 풍수지리에 관심을 가졌다. 여자의 몸으로 무학대사에게 풍수를 배워 《하소결》을 남기기도 했다. 울산김씨 17세인 김온과 결혼하여 한양에 살았으며 달근·달원·달지 세 아들을 두었다. 당시 태종은 왕권강화를 위해 민무구·민무질 등 외척세력을 숙청했다. 이때 남편 김온도 화를 당했다.

부인은 가족을 지키기 위해 세 아들을 데리고 전라도로 피신하였다. 그러나 어디로 갈지 막막하였다. 장성 갈재에 이르렀을 때 대추나무로 깎아 만든 매를 날렸다. 매가 한참을 날아가 내려 앉은 황룡면 맥동마을에 터를 잡고 정착하였다. 그녀는 아들 3형제를 모두 훌륭하게 키웠다. 장남 김달근은 좌순부사정, 달원은 충좌위중령부사정을 지냈으며 손자 김률은 문과에 급제하여 군수를 지냈다.

문묘에 배향된 김인후(1510~1560)는 달원의 4세손이다. 증조부 의강은 직장, 조부 환은 종사랑을 지냈다. 부친 령은 종9품인 의릉참봉에 임명되었지만 나아가지 않았다. 어려서부터 총명했던 김인후는 당시 전라도 관찰사였던 김안국에게 지도를 받았다. 1528년 성균관에 들어가 퇴계 이황(1501~1570)과 함께 공부를 했다. 중종35년(1540) 별시문과에 급제하였고, 1543년 홍문관 박사로 세자시강원에 들어가 당시 세자였던 인종을 가르쳤다.

그러나 인종이 즉위하여 9개월 만에 사망하고, 윤원형 일파 소윤이 대윤을 숙청한 을사사화가 발생했다. 이때 사림파들이 훈구파의 공격을 받아 큰 피해를 입었다. 김인후는 병을 이유로 사직하고 고향인 장성으로 돌아가 성리학 연구에만 정진하였다. 성(誠)과 경(敬)의 실천을 학문의 목표로 하고, 천문·지리·의악·산수·율력에도 정통하였다. 장성의 필암서원, 남원의 노봉서원, 옥과의 영귀서원에 배향되었다. 정조 20년(1796)에는 호남출신으로는 유일하게 문묘에 배향되었다.

이곳의 태조산은 내장산(763.5m)이고 중조산은 입암산(654.3m)과 방장산(742m)이다. 임암산과 방장산 사이로 호남고속도로 호남터널이 있다. 터널 위의 고개가 장성 갈재다. 전라남도와 전라북도의 경계를 이루는 지역에서 옛날 남도 사람들이 육로로 한양을 가려면 이 고개를 넘어야 해서 영남의 문경새재만큼 유명하다.

방장산에서 명정마을 들판으로 내려오는 산맥이 방향을 바꾸어 입암산을 바라보면서 혈을 맺었다. 이처럼 산맥이 출발한 조종산을 보고 있는 것을 회룡고조혈이라 한다. 용맥의 변화가 크기 때문에 대혈이 많다. 이곳도 호남팔대명당에 속할 만큼 대혈에 속한다. 현무봉에서 내려온 용맥이 잘록하게 결인한 다음 다시 위로 솟구쳐 둥근 봉우리를 만들고 멈추었다. 묘는 봉우리 위에 있는데 그 모습이 마치 가마솥을 엎어 놓은 것처럼 생겨서 복부혈(伏釜穴)이라 한다.

앞에 펼쳐진 들판은 넓고 평탄하며 원만하다. 산들은 호남정맥의 연맥들이 겹겹으로 감싸고 있어 기가 빠져나갈 빈틈이 없어 보인다. 용의 기세가 크고 혈이 단단하다. 부와 귀가 끊이지 않는 자리라 할만하다.

형산 정경연 인하대학교 정책대학원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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