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작품에서 ‘잡초’나 ‘이름모를 꽃’ 같은 표현은 어쩐지 치열하지 못한 느낌이다. 풀이나 꽃에 대한 작가의 상식이 부족한 것 아닌가 생각되기도 한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하지 않던가. 그래서 들국화로 퉁치기보다 망초, 쑥부쟁이, 벌개미취, 구절초로 변별하는 작가의 사랑과 관심은 한층 돋보인다. ‘섞일 잡’(雜)이 붙은 낱말은 어감이 좋지 않다. 잡일은 자잘한 일, 잡부는 막일꾼이다. 잡소리나 잡초, 잡념도 각각 쓸데없는 잔소리와 쓸모없는 풀이나 생각으로 이해된다. ‘잡(雜)’은 본래 여러가지가 섞이거나 모인 것이다. 그렇다보니 자연 어수선하거나 순수하지 못함, 낮고 천하다는 의미가 추가되었으리라.

서로 다른 것들이 한데 섞인 ‘잡스러움’이란 낱말이 부정적 의미로 소비되어 씁쓸하다. 잡(雜)의 부정적 활용에는 변별하지 않는 게으름과 무관심이 담긴 것 같기도 하다. 내 일 아니고 자세히 알지도 못하면 잡무라 치부하기 쉽고, 전공 분명하지 않은 글은 잡문이라 한다. 나와 연인의 얘기는 정담이라 하면서, 남이 그렇게 소근거리면 잡담이라 한다. 이처럼 어떤 낱말에 ‘잡’이라는 모자를 씌우는 행위는 일정 무관심이나 무지일 수도 있다. 그래서 ‘잡’의 서로 다름과 그것들의 섞임에 유의하여 잡종(雜種)을 생각해 본다.

잡종 뜻하는 말 ‘하이브리드’ 기술을 적용한 차는 유류와 전기처럼 서로 다른 2가지 연료를 모두 사용한다. 형편과 효율에 맞춰 연료 갈아쓰니 퍽 실용적이고 창의적이다. 절에서는 대개 대웅전 뒤로 칠성각과 산신당을 배치한다. 이전의 토속신앙 도교와 무속을 끌어안음인데, 이 같은 배려가 불교에 대한 거부감을 줄여 주었다. 이것은 각각 기술이나 종교의 섞임이다. 동성동본 금혼이라는 전통은 순혈의 폐해에 대한 경고를 담고있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2017년 현재 국내 외국인 수가 148만 명에 달하니, 동성동본 금혼의 의미 확장을 고민할 때이다. 귀에 친숙하여 국내자본으로 알고있지만 주식 소유에서 외국기업인 경우도 많다. 한국은 더이상 홀로 경제 꾸릴 수도, 안보 장담할 수도 없게 되었다.

서로 다른 여러 종의 섞임, 곧 잡종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융합이나 창의가 된다. 4차산업혁명을 대표하는 AI, 5G통신, 빅데이터 같은 기술은 모두 이종 기술의 복합이나 융합이다. 대학의 복수전공이나 융복합학과 같은 학제간 합종연횡도 역시 잡종우세 판단을 바탕에 깔고 있다. 잡종은 두 개의 서로 다른 종 입장에서 보면 중심에서 먼 변방, 다른 세계와의 접점이다. 그런데 이 변방은 대단히 역동적이다. 문화적 차이에 의한 대립을 부단히 절충하고, 언어와 기술을 번역 소개한다. 그러나 사회와 문화가 이미 하이브리드 잡종임에 불구하고, 국민의식은 현실을 따라가지 못한다. 근거 없는 순수와 순종 지향의 정서가 아직도 면면하다. 그래서 프론티어인 모든 분야의 선두 잡종들은 이른바 순종으로부터 비난받는다. 죽도 밥도 아니라 하고, 새인지 쥐인지 밝히라 하며, 양다리 걸치지 말라는 경고도 듣는다.

순종은 그 태생에서 흐트러짐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이 말은 동시에 순종이 창조적 다양성을 갖추지 못하였다는 거증이 된다. 이종이나 잡종의 다름을 인정하지 않고 틀리다 한다. 게다가 순혈주의는 갈수록 순혈을 강조한다. 밖에서 보면 다만 불통과 독선에 다름아닐뿐인데. 근래 한반도를 둘러싼 정치, 경제, 군사적 주장에 지나친 순종주의는 없는지 모르겠다. 대립되는 의견의 절충은 달리 말해 건강한 잡종의 생산이다. 그리고 이 절충은 일방의 승리가 아닌 쌍방의 양보에서야 가능하다. 명분만 챙기다 실리를 잃는 경우나, 그 반대 둘 다 옳지 않다.

유호명 경동대학교 대외협력실장

저작권자 © 중부일보 - 경기·인천의 든든한 친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