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유형문화재 제10호 우저서원

위치: 김포시 중봉로 25번길 87

‘우저서원’은 선조 대의 문신이자 학자이며,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동한 조헌(1544~1592)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1648년(인조 26년) 조헌의 옛 집터에 창건해 위패를 모신 곳이다. 1669년(현종 10년) 경 김포유생 이만춘 등이 청액소(請額蔬)를 올려 사액을 청하였지만 한창 첩설(疊設)에 따른 폐단이 논의되던 때라 실현되지 못하다가, 1675년(숙종 1년) 송준길의 청으로 ‘우저(牛渚)’라고 사액됐다. 1834년(순조 34년) 중건 이후 1871년(고종 8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훼철되지 않고 남아있다가 1973년부터 3년에 걸쳐 전면 보수가 이뤄졌다.

조헌의 본관은 백천(白川)이고, 자는 여식(汝式), 호는 중봉(重峯)·도원(陶原)·후율(後栗)이다.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의 문인으로 1567년(명종 22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사헌부감찰, 통진현감, 전라도도사 등을 역임했다. 1591년(선조 24년)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보낸 게이테쓰 겐소가 명나라를 칠 것을 전달하자 그를 처형하자는 소를 올렸으나 이러한 청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관직을 버리고 옥천에 은거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천에서 문인 이우(李瑀) 등과 의병 1천600여 명을 모아 영규(靈圭)의 승군(僧軍)과 함께 청주성을 수복했으나 전라도로 진격하려던 왜군에 맞서 금산에서 전투를 벌이다 전사했다. 1604년(선조37년)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1등으로 책록(冊錄), 1734년(영조 10년) 영의정에 추증(追贈)됐으며, ‘문열(文烈)’의 시호를 받고 1883년(고종 20년) 문묘에 종사(從祀)됐다.

경내의 건물로는 외삼문·동재·서재·강당·내삼문·사당 등이 있고, 사당 앞 우측에는 1617년(광해군 9년)에 건립된 조헌선생유허추모비(趙憲先生遺墟追慕碑)와 비각이 있다.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민도리 맞배지붕이다. 강당은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중앙의 4칸 대청 좌우에 2칸씩 온돌방이 있으며, ‘이택당’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매년 음력 2월 중정(中丁)과 조헌의 기일인 음력 8월18일에 향사(鄕祠)를 지내고 있다.

김동성기자

사진=김포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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