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 작년 이맘때였다. 갑자기 오른쪽 눈의 시야 반쪽에 까맣게 커튼이 드리워졌던 것이. 망막박리. 의료진은 수술 전 실명할 수도 있다고 최악의 경우까지 세세히 설명을 해주었다. 바로 다음날 응급수술에 들어갔는데, 수정체와 유리체를 모두 교체하고 망막을 여러 바늘 꿰멘 후 가스를 가득 채워놓는 수술이었다. 가스가 완전히 빠질 때까지 지난여름을 온전히 집에서 감금되다시피 했다.

조금씩 아주 조금씩 시야의 가장 외곽부터 보이기 시작하자 기적이 마치 내 눈 속에서 벌어지고 있는 느낌이었다. 그리고는 다짐을 하였다. 이제는 절대 지금까지처럼 살지 않겠다. 무리한 업무로 만성피로에 쩔어 있었고 눈이 시리고 따끔거려도 카메라 불빛 앞에 멀쩡히 앉아 있었다.

수술 후 한동안은 방송 일정들도 현저히 줄이고 컴퓨터 작업도 피했다. 복잡한 세상과는 좀 거리를 두어야겠다고 누누이 되새겼다. 사람들도 덜 만나고 술은 끊다시피 하고 모든 스트레스로부터 벗어나자. 이렇게 굳은 결심은 그러나 삼 개월을 넘기지 못했다. 한 달 후부턴 개강을 하여 강단에 서야 했고 두 달 후부턴 방송 일에 복귀해야 했다. 끔찍한 사건들은 계속 터지고 이 사회는 전문가들을 절실하게 필요로 했다.

수술의 후유증은 무지 심각했었는데, 바로 양안부등시. 왼쪽 눈으로 보이는 세상과 오른쪽 눈으로 보이는 세상은 너무나 달랐다. 그러다보니 계단을 오르내리는 일도 매우 힘들어 수술 직후에는 많이 넘어지고 부딪히기도 했었다. 운전을 다시 한 후로부터는 사소한 접촉사고도 여러 번 났었는데, 양 눈의 거리지각이 차이가 나다보니 여기저기 차를 북북 긁고 다닐 수밖에 없었다.

신기한 일은, 수술 이후 6개월이 훌쩍 지난 금년도 상반기부터 일어나기 시작했다. 우선 실수가 줄었다. 이런 기적은 바로 뇌가 정말 빠른 속도로 차이가 나는 시각정보들을 비교적 적응적으로 잘 해석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계단들이 분절되어 보이던 것이 이제는 서로 이어진 전체로 보이기도 하고 컴퓨터 화면 역시 시선을 옮기기도 힘든 수준에서 벗어났다. 그러다보니 다시 일 욕심이 모락모락 피어올라서는 이번 여름 예년 못지않게 많은 연구 작업들과 특강을 소화하기에 이르렀다.

인간의 적응력이란 너무나 신기하다. 심지어는 시각 격차까지 해소하다니. 나는 내 몸을 통해 현재 인체의 신비를 강력하게 경험하는 중이다. 다만 여전히 나아지지 않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나의 고질병, 바로 일중독이다. 몇 달 전까지만 하더라도 인생의 우선순위를 바꾸어보겠노라고 결심했었다. 시간에 쫓겨 일에 쫓겨 삶의 의미도 잊은 채 지나가는 세월들을 이제는 꼭 낚아보겠다는... 그러나 아무리 내 몸이 기적을 경험했다손 치더라도 여전히 어리석음이 앞선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미처 알지 못했다. 나는 오늘도 쳇바퀴에서 내려서지 못한 채 힘껏 달리고 있다. 이제는 멈춰야 한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관성의 습벽 속에서 이성적 판단력은 마비되었다.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도저히 멈추기 어려운 것이 바로 인생인가보다.

이수정 경기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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