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휴가를 맞아 아내와 함께 하서 김인후의 고향인 장성군 황룡면 맥호리 맥동마을을 들렀다. 맥동마을은 필자 할머니의 고향이다. 울산김씨인 할머니는 맥동댁이었다. 그러나 필자는 할머니를 뵌 적이 없다. 할머니께서는 1945년 30대의 젊은 나이로 만주에서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아내는 장손며느리로 매년 할머니 제사를 모시고 있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할머니와 아내가 좋은 만남이 이루어졌으면 좋겠다.

선친께서는 생전에 외가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다. 이 때문에 필자는 어릴 때부터 하서 대감의 이야기를 귀가 따갑도록 들었다. 그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절의(節義) 즉, 절개와 의리다. 사람은 의리를 저버려서는 안 된다는 말씀을 많이 하셨다. 아마도 하서 김인후의 생애가 그 후손들에게 끼친 영향일 것이다.

하서는 어려서부터 총명했다. 8세 때 전라도 관찰사로 부임한 조광조의 숙부인 조원기로부터 장성신동이란 칭찬을 들었다. 10세 때는 후임 관찰사인 김안국이 불러 소학을 가르쳤다. 22세 때(1531)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24세에 성균관에 입학해 퇴계 이황과 만나 함께 공부했다. 31세에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세자시강원에 소속된 설서(設書)가 되었다. 세자에게 경서와 사기, 도의를 가리키는 정7품의 벼슬이다. 33살의 하서와 28살의 세자는 절친이 되었다.

세자가 제12대 왕인 인종에 올랐으나 9개월 만에 31살의 젊은 나이로 죽음을 맞이했다. 궁궐에는 문정왕후가 독살했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 인종이 살아 있을 때 하서는 문정왕후가 왕의 약 처방을 하는 것을 의심하였다. 그래서 하서가 약 처방에 동참하겠다고 청원했으나 거절당했다. 오히려 전라도 곡성군 옥과 현감으로 발령이 났다. 하서는 인종이 죽자 옥과 현감을 사직하고 장성의 고향마을로 돌아왔다. 그리고 음력 7월 1일 인종의 제삿날이면 난산(卵山)에 올라 종일토록 통곡하였다.

난산은 맥동마을에서 들판 건너에 있는 작은 산이다. 하서종택의 안산에 해당되는데, 알처럼 둥글게 생겼다. 그 정상에 오르면 통곡대가 있는데 하서가 인종을 그리워하며 통곡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나뭇잎이 떨어진 계절에 이곳에 오르면 맥동마을 전체가 한눈에 보인다. 여름철에는 나무숲에 가려 보이지 않는데, 난산 아래 다리에서 보면 된다.

난산에서 마을을 바라보면 문수산에서 내려온 산들은 하나같이 순하고 모양이 반듯반듯하다. 귀한 봉우리가 하나만 있어도 좋다고 하는데, 이곳은 전후좌우로 귀인봉, 노적봉, 아미봉 들이 즐비하다. 풍수에서는 ‘산관인물(山管人物) 수관재물(水管財物)’이라 해서 산은 인물, 물은 재물로 본다. 우리나라의 문묘배향 18현 중에서 호남지방에서는 하서 김인후가 유일하다. 이 같은 인물이 배출된 배경을 산세에서 찾을 수가 있었다.

문수산에서부터 뻗어 마을로 내려오는 산들은 질서정연하다. 그 끝부분에 이르러서는 귀한 봉우리들이 반듯하다. 이들은 현무봉이 되는데 귀인봉 아래에 하서 종택이 있다. 아미봉 아래에는 종가 사랑채인 백화정이 있다. 마을 뒷산에서 좌우로 뻗은 청룡·백호는 마을을 안아주듯 감싸고 있다. 특히 외백호는 수연산(541m)에서 내려온 능선으로 마을은 물론, 마을 앞 들판, 그리고 관동천까지 감아주었다. 난산은 이 능선 중간에서 내려와 만들어진 것이다.

청룡의 끝은 필암 바위가 있는 곳이며, 이를 외백호 자락이 감싸고 있으니 수구가 완전히 관쇄되었다. 관쇄란 청룡과 백호 끝이 서로 반대 방향으로 엇갈려 교차하는 것을 말한다. 자연히 물이 나가는 수구가 좁아진다. 수구가 좁으면 장마철 물들이 한꺼번에 나가지 못하고 마을 들판으로 역류한다. 이때 상류에서 끌고 온 풍부한 유기질의 토사들이 퇴적하여 땅을 기름지게 한다. 마을 앞 들판을 문전옥답이라고 부르는 이유다. 그래서 풍수에서는 이 평탄·원만한 들판을 명당이라고 부르며 부로 해석한다.

배가 불러야 예도 알고 의리도 아는 법이다. 하서 김인후의 의리와 절개의 배경은 이 들판이 아니었을까. 풍수에서 귀부(貴富)보다 부귀(富貴)를 우선하는 이유일 것이다.

 

형산 정경연 인하대학교 정책대학원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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