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먹은 밥이 지금보다 구수했다는 필자의 느낌은 단순히 아련한 향수의 작용만은 아닌 것 같다. 벼를 끼니때마다 소요만큼만 절구에 찧었으니, 늘 갓 도정한 쌀로 밥을 지었다. 곡식을 절구에 넣어 찧은 후 키로 까분다. 까불어서 덜 부서지거나 뉘처럼 탈각되지 않은 것은 다시 찧고 또 까불어 고른다. 절구에서 잘게 부순 곡식이나 애초부터 자잘한 알곡은 맷돌에 갈아 가루로 만들기도 한다. 절구질과 맷돌질 그리고 키질의 궁극은 고른 찧기와 고운 빻기라는 ‘좋은 식재료’ 마련이다.

부수거나 짓이기는 찧기와 온전히 가루를 내는 빻기는 사뭇 다르다. 찧기가 다만 내리쳐 부수는 단순 동작이라면, 빻기에는 파쇄를 넘어 가루로 만든다는 목적이 담겨있다. 벼는 찧어 먹고 밀은 빻아 먹는다. 절구로는 벼를 타서 왕겨 벗기는 찧기와, 그렇게 나온 쌀알을 떡가루로 내는 빻기가 모두 가능하다. 어쩐지 찧기는 빻기보다 거칠고 미완성인 것 같은 느낌이다.

선별의 키질에는 상당한 요령이 있다. 두 팔 동시에 올리고 내리면서 날리고, 팔 높이를 번갈아 달리하며 낱알 외로 모로 모은다. 씨알별로 모이면 잘금잘금 키 밖으로 덜어낸다. 등지고 앉은 바람에 실어 꺼풀이며 먼지도 날린다. 그러니 차락차락 까불기야말로 까불거려 될 노릇이 아니다. 입으로만 까불거려야 어느 세월 고르고 발라 밥 짓고 찬 만드나. 키질은 가벼운 까불기이다만, 동시에 천천히 묵직해야 까불어진다.

물 조금 붓고 끓여 익히는 걸 다리거나 조린다고 하는데, 지지는 것을 달리 이르는 말이다. 기름 두른 번철에 익히는 걸 부친다고 하는데, 이것도 지지는 것이다. 불에 달군 것을 다른 데 대어 태우거나 눌리는 건 찜질인데, 이도 역시 지지는 것이다. 뜨끈뜨끈한 구들장 지고 누워 등짝을 방바닥에 지지기도 한다. 빗줄기 추적거릴 때 누름적 지져 놓고 마주앉으면, 둘의 감성은 물론 이성까지 잘 섞여 지져지겠다. ‘지지다’는 먹음직스럽고 뜨뜻하며 진득하기도 한 사랑스런 말이다.

불 위에서 식재료에 열을 가해 이리저리 뒤집고 섞고 저어 익히는 것은 볶는다고 한다. 물을 자작하게 넣거나 기름 둘러 볶기도 하고, 찻잎 덖듯 타지 않을 정도로 수분만 날리기도 한다. 타서 상하지 말라고 자꾸 뒤집고 젓는지라, 그렇게 들들 볶는 대상이 사람이 되면 이 때는 퍽 성가시고 괴로울 터이다. 한편 조리로서 지지기와 볶기 사이에는 많은 것이 함축된 듯하다. 데치고 삶고 찌고 끓이고 우리고 무치고 내리는 모든 조리법을 아울러 ‘지지고 볶다’로 퉁친 것 같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지지고 볶는 정겨움은 연인들의 멈출 수 없는 갈망이며 삶의 추력이다.

찧기와 까불기는 먹고살기 위해 아침저녁 늘 하는 일상이었다. 그래서 찧기와 까불기는 곧잘 사람에게도 붙여 말한다. 이 긴요한 찧고 까불기가 오늘날 왜 부정적 뉘앙스의 수군수군 뒷말로 전락하였는지 궁금하다. 당사자에게 발명 기회만 주어진다면, 여럿이 곱게 찧고 옳게 까부는 과정이야말로 바른 인물의 선별과 옳은 제도 수립의 초석이다. 여당과 야당의 진종일 찧고 까불기는 문제의 낱낱을 발리고 고르자는 소중한 논의이다. 확에 찧든가 키로 까불어 사안의 크기와 무게에서 불편부당을 없애는 과정이다.

게다가 맛난 풍미를 얻으려 지지고 볶으려면, 그에 앞서 재료를 찧고 까부는 전치절차가 꼭 필요하다. 제대로 찧고 까분 식재료 마련하지 못하면, 아무리 정성껏 지지고 볶아봐야 훌륭한 조리 될 턱이 없다. 지지고 볶기처럼 당장 군침 도는 눈앞의 즐거움 아니라 그저 못마땅한 짓으로 비치지만, 찧고 까불기야말로 일용할 양식의 바탕이다. 정성껏 찧고 까분 청문이 지지고 볶는 행복의 나라를 만든다.

유호명 경동대학교 대외협력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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