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시절이 있었다. ‘면(面)서기라도 해 먹으려면 글 배워야 했던’ 시절, 아니면 일찌감치 ‘기술이나 배워야 했던’ 시절. 공직자가 되는 길도 그땐 엉뚱했다. 소학교(초등학교) 졸업 학력이 그렇게 장애는 아니었다. 펜글씨 잘 쓰는 걸로 면서기가 된 사람도 있었다.
그렇게 된 면서기의 모습은 대충 이랬다. 아침 일찍 낡은 자전거를 타고 마을을 나선다. 뒷자리엔 도시락 보자기가 까만색 동아줄로 매여져 있다. ‘허연 잠바’에 ‘기지바지’를 입고 하얀색 운동화를 신었다. 머리엔 노란 새마을 마크가 선명한 파란색 모자를 썼던 것 같다.
그 시절 면서기에겐 잔업(殘業)이 많았다. 어쩌다 면사무소에 일보러 나온 동네사람의 일은 면서기가 도맡았다. 공무(公務)라곤 모르는 동네 어른들. 이 분들이 면사무소를 들어서며 찾는 건 담당 부서가 아니었다. ‘파란 대문집 아들 어디 있냐’ 였다. 그때부터 그 어른의 민원은 면서기가 전담했다. 필요한 서류를 모두 떼어 정성껏 손에 쥐어 줘야 끝났다.

<부지런한 면서기/머리 좋은 9급>
잔업은 퇴근 후에도 계속됐다. 집에서의 업무는 오히려 광범위하다. 새마을 부역, 쥐잡기, 취로사업신청…모든 행정을 도맡는다. 때론 준(準)사법기관이 될 때도 있다. 벌목이 금지된 나무를 베어 쌓아뒀다 경찰에 걸린 이웃집. 아주머니가 달려와 읍내 지서에 힘 좀 써달라고 조른다. 밤길을 달려가 그 집 아저씨를 데리고 오던 그 시절 면서기의 능력은 지금 생각해도 참 대단(?)했다.
공무원을 흔히 ‘公僕(공복)’이라고 한다. 공복은 ‘국가나 사회의 심부름꾼’이라고 풀이된다. 그렇게 보면 그 시절 면서기는 확실히 마을의 공복이었다.
이제 30년은 흘렀다. 면서기의 모습은 사라졌다. 출퇴근 길 자전거는 중형 자동차로 바뀌었다. 덜그럭거리던 도시락 통도 함께 사라졌다. 청(廳) 주변의 분위기 좋은 음식점은 예약 없이 방을 차지하기 어려울 정도다.
공무원이 되는 방법부터가 그때완 다르다. 글씨 예쁘게 쓰는 거 가지고는 어림도 없다. 마을에서 덕망을 쌓았다고 공무원 시켜 달랬다간 웃음거리만 된다. 4년제 대학을, 그것도 우수한 실력으로 마쳐야 한다.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수험생만 40만명이다. ‘9급 공무원을 꿈꾸는 사람들의 모임’이란 인터넷 카페가 있는데, 여기 회원이 29만8천100명이다.
이쯤 되면 고시(考試)다. 고시를 통해 뽑힌 인재들이니 부러움의 대상이다. 무엇보다 공무원은 이 시대 직장인의 공통된 고민으로부터도 자유롭다. ‘사건’과 ‘사고’에 의하지 않고는 잘리지 않는다. 30년이고 40년이고 헌법이 보장해 준다. 평균 명퇴 연령이 40대까지 내려온 우리네 현실에서 이보다 더 부러운 일은 없다.
‘불철주야(不撤晝夜)’로 대변되던 희생강요도 옛 이야기다. 공무원의 뒤엔 이익집단(노조·협의회)이 버티고 있다. 민선 장(長)이랍시고 공무원들을 업신여겼다간 망신당하기 일쑤다. 공무원에게 함부로 했다가 강아지 목에 이름이 달린 시장까지 있었다.
‘70년대 면서기’와 ‘2000년대 9급 공무원’은 이렇게 바뀌었다. 많이 좋아지고 훨씬 강해졌다. 그러나 그 사이 사정없이 사라져버린 게 있다. 동네 사람에게 받던 한없는 존경과 듬직함이 사라졌다. 존경은커녕 이유 없이 미움을 받기가 다반사다.

<국민에 포위된 위기의 공직사회>
“왜, 내가 50만원씩 털어 공무원 연금의 빈 곳간을 채워야 하느냐”며 따진다. “왜, 새파랗게 젊은것들도 직장에서 쫓겨나는 세상인데, 공무원만 환갑 지내고도 5년을 더 하려 드느냐”며 몰아세운다.
때마침 주말에 TV에서 공무원 연금문제 토론을 하던데, 공직자를 대변하는 패널 두 사람이 차분하면서도 논리적인 발언을 했다. 난 공감이 갔다. 그러나 토론회가 끝난 뒤 그 방송 홈페이지를 보고 깜짝 놀랐다. 공무원 비난 일색이었다. ‘공무원=철밥통’이란 여론은 하나도 바뀌지 않았다.
아주 가까운 과거부터였던 것 같은데…. 공무원들의 주장이 여론의 벽에 부딪히고 있다는 느낌이다. 뭘 해도 칭찬해주지 않고, 별 것 아닌 것에 융단폭격을 가한다.
과연, 공무원들에게 지금은 어느 시절인가.
훌륭한 인재가 모이고, 다양한 목소리가 보장되는 ‘좋은 시절’? 아니면 피골이 상접한 국민들이 ‘너희 밥그릇도 나눌 차례’라며 사방에서 으르렁거리는 ‘위기의 시절’?

김종구/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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