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숨결어린 요동- 고구려 유적 답사기행<12>

<해양방어 요새 비사성> 2
수·당나라군과 치열하게 접전했던 비사성
비사성은 대흑산 복판과 남측 두 산봉우리 사이의 협곡을 에워싸며 산등성이를 따라 축조했는데 성벽의 너비는 3.3m, 높이는 3~5m, 둘레의 길이는 약 5천m이다.
성벽은 산 위에서 나는 석영암을 쌓은 것으로 거의 허물어지고 없으며 남은 성벽 중 가장 높은 곳이 약 3m, 너비는 2m 정도다. 1988년과 1990년 국가문물국은 자금을 조달하여 비사성의 훼손된 곳을 정비토록 했다.
산 아래에 있는 대흑산풍경구 정문에서 산위에 있는 비사성 성문(서문)에 이르려면 가파른 비탈길을 따라 굽이굽이 돌아서 올라가야 한다. 이 길은 경사도가 심하고 위태로워 성안으로 들어가는 관광객 차량을 엄격하게 통제하고 있다. 산위에 오르면 첫 눈에 띄는 것이 바로 비사성 성문이다. 이 성문은 몇 해 전에 새로 세운 것으로, 정면에는 대련시 정부에서 세운 ‘성급 문화재 대흑산산성’이란 비석이 있고 성문 바깥 측면에는 복원해 놓은 성벽이 깎아지른 듯한 절벽 변두리를 따라서 양쪽으로 뻗어있다. 성 안에 들어서면 넓고도 길쭉하며 확 트인 공터가 나타나는데, 여기에는 널따란 시멘트길이 성벽을 따라 남쪽으로 주차장을 지나 장대터까지 이어져 있다. 까마득한 절벽 위에 있는 고구려시대의 장대터는 3천년 전 춘추시대 사람들이 하늘제를 지내는 단대(壇臺)였다고도 한다. 그래서인지 지금은 이 자리에 성의 누각처럼 생긴 엄청난 규모의 2층 건축물을 지어 놓았다. ‘옥황정(玉皇頂)’이라 일컫는 이 건축 아래층에는 옥황상제(인형)를 모셔놓고 위층에는 두 겹의 지붕으로 된 정자(亭子)를 세워놓은 성가퀴에 둘러싸인 전망대다. 여기서 금주 시내와 멀리 발해만의 수평선이 한눈에 조망된다. 맑은 날 해질 무렵 전망대에 올라서 사방을 바라보면 기막힌 경관이 나타난다. 서쪽 하늘가에 붉게 타오르는 노을빛이 이쪽 산봉우리와 산성, 그리고 성 안의 나무숲과 건축물들을 빨갛게 물들이고, 뽀얀 안개가 드리우고 있는 산 아래 마을에는 저녁밥을 짓는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으며, 저 멀리 금빛으로 반짝이는 바다에는 줄을 지어 돌아오는 고깃배들이 꿈틀거리고 있다…. 그야말로 사람을 황홀케 하는 한 폭의 그림이다. 그 옛날, 고구려인은 이 장대에서 침입해 오는 적군함대의 움직임을 지켜보면서 결전을 준비했을 것이다.
장대에서 북으로 약 700~800m 사이 두고 대흑산의 주봉이 보인다. 그 위에 텔레비전신호전송탑이 세워져 있다. 주봉에 올라가 보기로 했다.
주봉 아래까지 차를 몰고 가니 자그마한 주차장이 있고 꼭대기로 올라가는 계단이 양쪽으로 나 있는데 관광객으로 보이는 몇 사람이 올라가고 있었다. 한 중년 사내가 우리를 뒤따라 아는 체를 했다. 정대평(鄭代平·51)이라고 하는 사내는 대련해창(海創) 과학기술정보회사의 기사로 일하고 있단다. 대련TV방송국의 통신시설 정비작업을 자기네 회사에서 맡았기 때문에 늘 이곳에 온다고 했다. 그만큼 이곳에 익숙한 듯 우리에게 이것저것 설명해 주며 길안내를 하였다.
가파른 돌계단을 올라 TV신호전송시설이 있는 주봉 꼭대기에 이르니 눈앞이 탁 트인다. 날씨는 흐릿했지만 방금 가 보았던 장대와 성문이 남쪽 발아래로 보이고, 북쪽으로는 서쪽에서 동쪽으로 향하는 대련~단동 간 고속도로가 어렴풋이 보였다. 이곳에서 산 아래 대련경제개발구와 금주구는 물론, 저 멀리 고층건물이 즐비하게 늘어선 대련도심이 한 눈에 조망되고 황해와 발해, 그리고 4개 항만(대요만<大窯灣>, 소요만<小窯灣>, 대련만<大連灣>, 금주만<金州灣>)도 뚜렷이 보인다. 운이 좋으면 아침에는 황해바다의 해돋이를, 저녁 무렵에는 발해의 일몰을 감상할 수 있다. 하지만 아쉽게도 우리가 이곳에 올랐을 땐 안개가 자욱하여 대련시와 금주구 시가지만 희미하게 보일 뿐이었다.
주봉 오른쪽에는 대련시와 금주구TV신호발사탑이 세워져 있고, 왼쪽에는 골짜기를 사이 두고 군사용 레이더시설이라고 하는 건물 몇 채가 있다. 이 건물을 지나 비사성 동쪽 성벽으로 가는 길은 통행이 금지되어 더 이상 갈 수 없었다.
오늘의 비사성은 그토록 조용하고 평화롭지만 1천300여년 전 이곳에는 수많은 군기가 바람에 펄럭이고, 고각소리가 세차게 울려 퍼졌으며, 창검들이 공중에서 번쩍였을 것이다. 여기에서 수나라, 당나라군이 고구려군과의 치열한 공방전(攻防戰)이 벌어졌다.
문헌에 따르면 동진(東晉) 이전까지 고구려는 요동을 차지하지 못했다. 동진 함강(咸康) 7년(서기 341년) 전연(前燕)의 모용황이 군사를 일으켜 고구려를 공격한다. 그러나 끊이지 않는 전란으로 모용씨의 세력은 날로 쇠락되고 반면 고구려는 그 기세를 빌어 세력을 서남쪽으로 넓혀 나간다. 동진 의희(義熙) 6년(서기 410년) 이후 고구려는 요동반도를 점령하기에 이른다. 요동성을 중심으로 영지를 확보하기 위해 고구려는 방어용 성을 쌓기 시작했다. 비사성은 바로 이 시기 남쪽의 바다 수비를 위해 세워졌던 것이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영양왕 23년(서기 612년)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6월 기미(己未)에 수제(隋帝)가 요동성 남쪽에 행차하여 성지(城池)와 형세를 관찰한 뒤 여러 장수를 불러 꾸짖었다”… “여러 장수들이 두려워 낯색이 변하였다. 수제는 성 서쪽 수 리 밖 육합성에 어거했다. 우리(고구려) 여러 성이 굳게 지키고 나오지 않으니 (수나라) 좌익위 대장군 내호아(來護兒)가 먼저 강회 수군을 거느리고 수백 리 바닷길을 배를 타고 들어왔다. 패수로 들어와 평양과 60리 거리의 지점에 이르러 아군(고구려)과 만나 진격하여 크게 이겼다. 호아가 승세를 몰아 성을 탈취하려 하자 부총관 주법상이 말리며 여러 방면의 군사가 도착하기를 기다렸다가 함께 진격하자고 했다. 호아는 듣지 않고 정병 수만 명을 뽑아 곧장 성 밑으로 달려갔다. 아군 장수는 성을 비워두고 복병을 숨겨놓은 후 출병하여 호아와 싸우다가 거짓 패하였다. 호아가 쫓아서 성 안에 들어와 군사를 풀어 노략질 하느라 대오가 흩어지게 되자 복병이 뛰어 나왔다. 호아는 크게 패하여 겨우 빠져나가니 살아남은 군사가 수천 명에 불과했다. 아군은 부두에까지 쫓아갔으나 주법상이 진을 치고 지키고 있으므로 물러났다. 호아는 군사를 끌고 돌아가 해포에 주둔하고 감히 다시 나오지 못하고 제군을 응접하였다.”
이것이 수나라군이 비사성을 공격한 첫 기록이다. 수군이 비사성을 공격한 것은 평양으로 진격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사서에는 나온다.
“영양왕(영陽王) 25년(서기 614년) 봄 2월 (수나라)황제가 모든 신하들에게 조서를 내려 고구려를 정벌할 일을 의논하게 했는데, 여러 날 동안 감히 말하는 자가 없었다. 조서를 내려 천하의 군사를 다시 징발(徵發)하여 여러 길로 함께 진군하게 했다. 7월 황제의 수레가 회원진에 행차했다. 이때 천하가 이미 어지러워져서 징발된 군사들이 기일을 어기고 도달하지 못한 자가 많았으며, 우리나라(고구려)도 역시 지쳐 있었다. 내호아가 비사성에 이르자 우리 군사가 맞아 싸웠으나, 내호아가 쳐서 이기고 평양으로 향하려고 했다. 왕은 두려워 사신을 보내 항복을 청하니, 황제가 크게 기뻐하고 사신을 보내 내호아를 소환했다. 8월에 황제가 회원진으로부터 군대를 돌이켰다.”
《수서·내호업전(隋書·來護業傳)》에는 “대업(大業) 10년(614), 내호아가 군사를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비사성에 이르렀다. 고구려는 나와 싸웠다. 호아는 (고구려군을) 크게 격파하고 천여 급을 베었다”는 기록이 있고 《자치통감(資治通鑑)》 권182에도 수양제 대업 10년에 일어났던 이 전쟁을 기록해 두었다.
당 정관(貞觀) 19년(서기 645년) 당 태종은 형부상서(刑部上書) 운국공 장량(張亮)을 평양도행군(平壤道行軍) 대총독(大總督)으로 삼아 수군(水軍)을 거느리고 산동반도의 동래(東萊)로 해서 요동반도 남쪽으로 상륙하여 비사성을 공격하게 했다. 장량은 밤을 틈타 비사성을 공격했다. 사면이 절벽이므로 서문을 공격했다. “5월 기사(己巳)일에 함락하고 남녀 8천 구를 포획했다….” 서기 645년 당나라군은 요동을 수복하고 668년에 고구려는 멸망하고 말았다.
장광섭/중국문화전문기자  윤재윤/요령조선문보기자
저작권자 © 중부일보 - 경기·인천의 든든한 친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