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숨결어린 요동- 고구려 유적 답사기행<13>

 대흑산풍경구 정문에서 다시 차를 타고 오던 길을 되돌아 왼쪽으로 조금만 가면 산골짜기 입구에 마무리를 앞두고 한창 공사 중인 당왕전 도원(道院)이 있다. 이 건물 뒤로 쳐다보니 우리가 방금 올라갔던 비사성 장대가 100m도 더 되어 보이는 높은 벼랑 꼭대기 언저리에 까마득하니 매달려 있다. 이곳을 지나면 바로 봉황곡(鳳凰谷)이라는 험하고 긴 계곡이다. 계곡에는 산물이 흘러내리고 씻긴 듯한 바위들이 널려 있는 가운데로 사람들이 올라갈 수 있게 돌계단을 깔아 놓았다. 양 옆으로는 아찔한 절벽이 병풍처럼 죽 늘어서 있는데, 그 절벽에는 여러 가지 색상의 암층이 겹쳐 쌓여 마치 알록달록한 띠가 벼랑에 붙어있는 것 같았다. 이것은 대자연이 인간에게 가져다 준 선물로, 다양한 색깔의 띠처럼 된 침적 석영암으로 구성된 대흑산이 멀고 먼 옛날에 격렬한 지각의 운동으로 말미암아 암층이 단절되거나 가라앉아 형성된 채색단층 ‘그림 절벽’이다. 이런 절벽에 상전벽해(桑田碧海)의 세상 변화사 흔적이 남아 있어 대흑산은 중국 국가 지질박물관으로 지정됐다.
계곡을 따라 조금 더 올라가면 돌로 쌓은 성문에 이른다. 성문 왼편으로 바위벼랑을 사이에 두고 키가 큰 사람 모양의 바위 하나가 서 있어 마치 수문장수가 성문을 지키는 듯하다. 여기가 바로 관문채(關門寨)다. 비사성은 사방으로 가파른 산비탈과 현애절벽으로 둘러싸여 본래는 서문으로만 성안에 들어갈 수 있다. 그런데 그 서문으로 올라가는 입구가 바로 관문채이고, 또 여기서 산성 가운데로 올라가는 유일한 통로도 관문채 골짜기다. 관문채로 오는 길에 물통을 든 사람들이 끊임없이 오르내리는 것이 보였다. 알고 보니 이들은 모두 산 아래 주민들로서, 이곳의 약수를 받기 위해 온 사람들이었다. 산 아래 금주구 우의향 팔리촌에 산다는 후씨라는 60대의 노인도 그 중의 한 사람이다. 약수를 받으며 우리와 한담하던 그는 뜻밖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바로 관문채 성문을 조성해 놓은 곳에서 수십m 남쪽 오른편으로 보이는 요(凹)자형 바위벼랑, 방금 전 우리가 올라오면서 보았던 ‘수문장수’와 바위벼랑 사이가 바로 옛 관문이라는 것이다. 그는 어릴 적 이곳에 성문의 흔적과 위로 수레도 다닐 수 있을 정도로 두터운 성벽을 쌓았던 가공석들이 있는 것을 보았는데 부근 사람들이 헐어갔다고 했다. 그의 말대로라면 현재 성문을 조성해 놓은 관문채 아래쪽은 배수로만 남겨놓고 모두 성벽을 쌓았으며 사람들은 오른쪽 벼랑 사이에 난 좁은 성문으로 다녔다는 것이다. 옛날에 이 관문은 한 병사만 지키고 있으면 천군만마로도 공략할 수 없는 험준한 요새였다. 그러므로 옛적에 장량이 당나라군대를 이끌고 이 관문을 여러 번 쳐도 끄떡하지 않으니 고구려인의 개구리를 숭상하는 습속을 빌어 교묘하게 개구리왕의 신통력을 이용하여 이 관문을 열게 되어 비사성을 공략해 냈다고 전한다.
관문채 골짜기는 동서주향으로 10km 뻗어 나갔다. 관문채에 들어서서 동쪽으로 250m쯤 가다가 걸음을 멈추고 차분히 남쪽으로 쳐다보면 모양이 부처님 같은 커다란 바위돌이 ‘얼굴’을 서쪽으로 향하고 서 있는데 그 모습이 점잖고 경건한 자세로 골짜기로 들어오는 관광객을 하나하나 맞이하고 있는 듯했다. 듣건대 이 자연석 부처님을 바라보는 순간, 사람들은 감전된 듯 짜르르한 느낌이 와 부처님의 마음과 서로 통하게 되어 극도로 흥분된 자신을 자제할 수 없다고 한다. 이리하여 마음가짐이 수련되어 모든 재앙을 피면할 수 있게 되고 한평생 평안해진다고 한다.
이곳을 지나 계속 동쪽으로 나아가면 깊숙한 골짜기에 이른다. 양측에는 우뚝우뚝 겹으로 솟아 있는 기암괴석들이 알록달록 다채롭게 여러 가지 형태를 이루고 있다. 어떤 것은 신기한 채찍처럼 불쑥 솟아나 있고, 어떤 것은 신화에서 나오는 짐승과 흡사하며, 어떤 것은 세찬 파도 모양이요, 어떤 것은 신선과 방불하다. 정말 신기한 암석의 세계다. 여기가 바로 요자구인데 옛날에 새매와 솔개들이 많이 모여 둥지를 틀고 살았다 하는 곳이라서 그렇게 불러왔다고 한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청나라 때, 이 근처에 있는 금주에다 솔개 깃을 다듬는 공장을 세워 요자구의 솔개를 많이 잡아다가 조정에서 관직의 계급을 나타내고 궁전의 장식에 쓰는 깃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 많던 솔개가 사라져 지금까지도 그 그림자조차 보기 힘들어졌다고 현지인들은 말한다.
요자구를 거쳐 골짜기 동쪽 끄트머리에 이르면 서로 10m를 사이 둔 두 갈래 샘물이 찻물을 따르는 소리를 내며 흐르다가 길목에서 합수한다. 이것이 당 태종이 물을 마셨다는 적수호(滴水壺)와 설인귀가 말에게 물을 먹였다는 음마만(飮馬灣)이다. 이곳에서 길을 꺾어 서북쪽으로 ‘18반’길을 올라가면 비사성 가운데 있는 당왕전과 서문, 장대에 이를 수 있다. 사실 ’18반’은 열여덟 굽잇길이 아니라 길이 아주 험악하고 구비도리가 많다는 뜻으로 지어진 이름이다. 이 길의 위험한 곳에다 난간을 설치해 놓았지만 오르는 사람들은 대부분 감히 뒤돌아보지 못 한다. 왜냐면 발 밑 계단 아래에는 아찔한 낭떠러지이기 때문이다.
 장광섭/중국문화전문기자  윤재윤/요령조선문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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