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부성·대장성 할 때의 성(省)은 중국 관청에 붙이던 한자, 기내(畿內)는 천자의 왕성 주변 지칭이다. 그래서 이 말들은 일본 천황제의 제도적 장치이다. 천황의 일본과 황제의 고려를 생각하면, 유약했던 제후국 조선은 퍽 아쉽다. 고려 황제는 ‘짐’을 자칭하였으나, 조선왕은 ‘과인’이라 낮추었다. 고려의 신민은 폐하께 만세를 외쳤으나, 조선의 신하는 전하의 천세를 올렸을 뿐이다. 고려는 성(省)을, 조선은 조(曹)를 관청 이름에 붙였다. 왕건은 연호 ‘천수’를 정하고, 세자 아닌 태자에게 황위를 전하였다. 원나라 침입 이전의 고려는 확실히 황제의 나라다.

광역자치단체 이름 ‘경기도’는 특별하다. 충청도가 충주·청주, 경상도가 경주·상주의 조합인 것과 달리, 경기도는 황제국 고려의 자존감 높은 지명이다. 경기(京畿)의 畿(기)는 주나라 때 왕성 밖 5백리까지를 이르던 말이다. 중국 당나라 때 왕성 방위 목적으로 경현(京)과 기현(畿)을 두었는데, 이를 합성한 ‘경기’가 고려 경기의 모델이다. 고려 현종은 995년 개경(개성) 주변 6개 현을 경현(京縣), 다른 7개 현을 기현(畿縣)으로 정했다. 이것이 오늘날 경기도(京畿道)의 기원이다.

고려의 개경 주변 경기는 점차 커져서, 문종 23년(1069)에는 북으로 황해도 곡산·수안, 남으로 화성과 시흥·과천까지 확대되었다. 조선은 한양 중심으로 경기를 재설정하는데, 태종 14년(1414)에 이르면 지금의 경기도에서 가평과 평택·안성을 뺀 형태로 남하한다. 개경(개성)은 한양(서울)의 북서쪽에 있다. 그래서 두 왕조의 경기도를 비교하면, 고려시대에는 황해도 남부가 들어간 대신 현재 경기도의 동남부가 빠진다. 개략적으로 한강·북한강 동쪽과, 경기남부 수원·평택·안성은 경기도가 아니었다.

내년 총선을 앞두고 경기도 분도 얘기가 다시 나온다. 연천, 포천, 양주, 남양주를 비롯한 경기북부 10개 시·군 면적은 경기도 전체의 42%에 이른다. 지난달의 인구 344만 명도 광역단체 중 서울, 경기남부, 부산에 이어 4번째로 많다. 경기북부의 지역내총생산 규모도 다른 광역단체에 비해 적지 않다. 이러한 지표들이 경기도 분도론, 즉 경기북부의 독립에 상당한 당위성을 부여한다.

앞서 ‘경기’의 연원을 살핀 연유는 분도 논의에 있다. 분도에 있어 경기북도와 경기남도라는 명칭은 어쩌진 기계적이고 고민도 부족한 느낌이다. ‘평화통일특별도’라는 말 유통되던데, 통일 이후에도 이 명칭이 계속 의미를 지닐지는 의문이다. 인접 강원도와 이 명칭 놓고 다투지 않을까 염려스럽기도 하다. 게다가 경기북부 광역자치단체는 장차 분단 이전의 경기도 장단과 개풍, 경기도 생활권이라 할 강원도 철원도 품어야 할 것 같다.

살펴보니 연천·파주는 1018년부터 1천년 내내 경기도였다. 고양, 동두천·양주·의정부, 포천, 구리·남양주도 950년간 경기도였다. 그러나 하남·여주 등 옛 광주 땅과 수원·용인 등은 1404년에야 경기도가 되었다. 더 남쪽의 평택·안성은 충청도와 경기도 오가다 일제강점기에 편입되었다. 그러니 경기북부는 1천년, 경기남부는 6백년간 경기도였다. 더욱이 경기북부는 고려와 조선 왕조를 관통하여 경기도다. 다소 거칠게 표현해서 ‘경기도’라는 지명의 역사성과 고유성은 경기북부에 있다.

말에 담긴 자존감과 그 천년 역사에서, 지명 ‘경기도’는 퍽 매력적이다. 명칭 계승을 위해 다툴만하다. 분도가 이뤄진다면, 의정부 시민인 필자는 ‘경기도’ 지명이 고려 경기와 조선 경기의 지정적 교집합인 경기북부에 한정되기를 바란다. 그랬을 때, 고려시대 양광도의 광주였던 현재의 경기남부 지역을 무엇으로 명명하면 좋을지 모르겠다만.

유호명 경동대학교 홍보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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