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의 임시정부, 가흥과 해염, 항주로 옮겨 가다.

역사여행은 유적과 유물(點), 그리고 공간(面)을 만나거나 추체험하기 위해 이동(線)을 전제로 한다. 선(線)은 곧 길이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이동 경로는 ‘길(路程)’에 대한 이야기다. 상해에서 중경에 이르는 임시정부 이동로에서 임정 요인, 그리고 그들의 곁을 지킨 가족들의 행적을 살펴본다. 풍찬노숙을 감내하며 요인, 지사들의 곁을 지킨 가족들 역시 독립운동가였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임시정부 이동 경로와 가족들의 행적을 추적하는 것은 길 위에서 우리 역사의 한 장면을 만나는 일이다.

1932년 4월 29일, 한인애국단 단원이었던 윤봉길 의사가 상해 홍구공원에서 의거를 일으켰다. 상해를 점령하고 아시아 침략의 발판을 마련하려던 일본의 고위 군부 인사들을 폭탄으로 처단하는 의거(義擧)를 성공시킨 것이다. 이 사건을 구실삼아 일본은 상해지역 독립운동가와 임시정부 요인들에 대한 대대적인 체포 작전을 펼쳤다. 안창호는 미처 피신하지 못한 채 이유필의 집을 다녀오다 붙들려 감옥에 갇혔고, 김구는 홍구공원 의거의 배후임을 밝히고 가흥(嘉興)과 해염(海鹽)으로 몸을 피했다. 임시정부는 항주(杭州)로 근거지를 옮겼다.
 

김구, 중국(인)의 조력을 받다

엄혹한 시기였다. 내 나라가 아닌 이국땅에서 일제의 감시와 압박을 피해 조국의 독립을 위해 투신했던 임정요인들과 숱한 독립운동가들이 활동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중국(인)의 조력이 많은 역할을 했다. 국민당 정부의 조직적이고, 호혜적인 지지 없이는 중국내 거점 확보와 요인들의 활동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물론 이러한 지원이 가능했던 이유 중 하나는 윤봉길 의사의 홍구공원 의거였다. 홍구공원 의거는 만보산 사건 등을 통해 조선인에 대해 불편한 시선을 감추지 않았던 중국인들뿐만 아니라 세계 각국의 관심을 유도하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중국 국민당 정부는 홍구의거를 높이 평가했다. 그들은 인적, 조직적 네트워크를 활용하여 임정과 김구의 활동을 지원하였다.

1932년 5월에 김구가 상해를 벗어나 처음 피신한 곳이 가흥이었다. 가흥과 해염을 오가며 임정의 명맥을 이었다. 가흥과 해염에서 은신하며 활동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국민당 요인인 저보성(?輔成)선생 일가의 도움이 절대적이었다. 김구가 머물렀던 장소는 가흥시 매만가 79호로 알려져 있다. 집 앞에는 ‘김구피난처(金九避難處)’라는 표석이 세워져 있다. 김구피난처는 저보성의 수양아들 진동생(陳桐生)의 집이다. 청나라 말기에 벽돌과 나무로 지은 전통 가옥으로 절강 이남의 전통 가옥 양식이 남아 있는 집이다.

저보성의 손녀인 저리정(?離貞, 71세) 여사를 만날 수 있었다. 그녀는 한국에서 찾아오는 많은 답사팀들에게 감사하다고 했다. 누가 누구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해야 하는가? 오히려 부끄러움이 앞섰다. 그녀의 안내로 집 안을 둘러 보았다. 집 안쪽으로 들어가면 1층에 기념관이 조성되어 있고, 2층에는 은거했던 김구의 침실과 집기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2층 침실의 창밖에는 남호(南湖)가 아름답게 펼쳐져 있다. 집 안쪽으로 난 작은 창에는 집안 내부를 관찰할 수 있어서 외부의 위험을 감지할 수 있었고, 위급할 때 급히 1층으로 피신할 수 있는 문이 설치되어 있었다. 1층 좁은 복도를 지나면 남호에 댄 오공선(쪽배)을 타고 피할 수 있는 구조로 되어 있었다. 낮엔 배를 타고 남호와 가흥 일대의 수로(운하)를 따라 이동하며 일본 밀정의 눈을 피해야 했다.

이러한 가흥에서의 생활에는 중국인 처녀 뱃사공 주애보(朱愛寶)의 헌신도 빼놓을 수 없음이다. 그녀는 가흥과 남경 시절 몇 해 동안 김구의 은신을 적극 도왔던 이다. 사람 사는 세상의 가장 슬픈 일이 이별일진대 이별 중의 가장 슬픈 이별은 생이별이라 했다. 일본의 남경 침공 때 김구와 헤어져야 했던 주애보에게 김구는 예를 갖추어 보내주지 못한 미안함을 <백범일지>에 기록하기도 했다.

 

가흥 일휘교 임정요인 숙소-김의한정정화침실
 
가흥 해염 재청별서 오르는 길
 

가흥 매만가와 일휘교, 임정요인·가족들의 행적 남아

탐방단은 가흥과 해염의 임정 가족들이 머물렀던 공간들을 답사했다. 김구피난처인 매만가에서 약 300m가량 떨어진 일휘교 17호에 임정 가족들의 거처가 마련되었다. 1층에는 전시실이 있고, 오른쪽에 주방이, 왼쪽에 응접실이 있다. 임정 가족들의 거처는 2층에 마련되었다. 김구의 모친 곽낙원 여사와 아들 김인, 이동녕, 박찬익, 김의한-정정화부부 가족, 엄항섭 가족들이 모여 살았던 2층에 당시 생활을 엿볼 수 있는 가구와 침구들이 복원되어 있었다. 거처지는 가족 단위로 살아야 했고, 쪽방처럼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등불이 약해 당시의 사정을 연상시키듯 침울함마저 감돌았다. 일본의 감시를 피해 살아야 했던 시절, 임정 요인, 가족들의 고단한 삶이 그대로 묻어나는 곳이어서 마음이 쓰이는 곳이다.

취재탐방단에 동행한 김미현씨가 김의한-정정화 가족 방으로 들어가 둘러보며 침대를 어루만졌다. 할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아버지의 체취가 남아 있는 공간에 서 있는 셈이니 감회가 남달랐으리라. 그녀의 증조부는 조선 말의 관료이자 대한제국의 대신으로, 3.1운동이 일어난 1919년 10월에 고관대작으로서의 지위를 내려놓은 채 아들 김의한을 데리고 상해로 망명한 동농 김가진(金嘉鎭, 1846~1922)이다. 상해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작고하였으며 만국공묘에 묻혔다. 할아버지 김의한(金毅漢, 1900~1964)과 할머니 정정화(鄭靖和, 1900~1991, <長江日記> 남김) 여사는 부부 독립운동가이자 임정 요인이었고, 아버지 김자동(90세,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회장)선생은 일휘교 2층을 뛰어다니던 ‘임정소년’이었다. 할머니 품에서 컸다는 김미현씨는 어렸을 적 할머니로부터 ‘옛날이야기’를 많이 들으며 생활했다며, 할아버지 할머니의 침상을 어루만지며 감회에 젖기도 했다. 김구의 가장 밀접한 동지의 한사람이었던 엄항섭 가족과의 친분도 소개하면서 독립운동가 후손들의 교류가 지속되기를 소망했다.

 

재청별서에서의 반년

김구는 가흥에서 일본 밀정으로부터 추격망이 좁혀오자 위급한 상황을 맞았다. 피난처가 노출되자 피신처를 다시 물색했다. 해염의 재청별서(裁靑別墅)였다. 해염으로의 피신에는 저보성 선생의 며느리 주가예(朱佳?)와 그의 집안이 많은 도움을 주었다. 주가예의 친정은 해염의 부호였다. 재청별서는 가흥 동남쪽 해염의 남북호(南北湖)에 위치한 해염 주(朱)씨의 별장으로 주가예 친정 별장이었다. 지금의 남북호풍경구 내에 있다.

주가예는 해산한지 얼마 되지 않은 몸으로 산길을 걸어 해염의 재청별서로 김구를 안내를 했는데, 뒤따르며 당시의 정경을 바라본 김구는 활동영상(동영상) 기록이라도 할 수 있다면, 남겨서 영원히 그 고마움을 잊지 않고자 했던 마음을 드러내기도 했다. 김구는 후일 <백범일지>에서, "만약 나라가 독립되면 나의 자손이나 동포 누가 주부인의 용감성과 친절을 흠모하고 존경치 않으리오. 활동사진은 찍어두지 못하나 문자로나마 기록하여 후세에 전하고자 이 글을 쓴다."라고 했고, "나의 겨레는 저보성 선생 집안의 정성 어린 친절에 어찌 감동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인가"라고, 당시의 절박함을 헤쳐나갈 수 있도록 성심을 다한 그들의 고마움을 표현했다. 매만가에서 저보성 선생의 손녀를 만났을 때 김구의 마음을 헤아려보지 않을 수 없었다.

김구는 한적한 이곳에서 약 반년을 머물렀다. 임정의 책임있는 위치에 있던 몸으로 독립운동에 대한 복잡한 심경이야 어쩔 수 없었겠지만, 몸은 편안한 시절이 아니었을까? "우리나라를 떠나 생활한 14년 동안 남들은 난징, 수저우, 항저우의 자연을 즐기고 이야기하는 말도 들었으나, 나는 상하이에서 한 걸음도 밖으로 나서지 못해 산과 물이 그리웠는데, 이곳에서 매일 산에 오르고 물에 나가는 취미는 정말 유쾌하였다."라고 회고하기도 했다. 그러나 비록 피신은 쉬웠을지라도 임시정부의 요인들과의 연락과 외부활동이 자유롭지 못해 반년 만에 다시 가흥으로 돌아갔다.

 

재청별서(저보성 며느리 주가예 친정 별장)
 

항주에 설치된 대한민국임시정부

상해 홍구공원 의거 이후 대한민국임시정부는 근거지를 항주로 옮겼다. 김구를 비롯한 일부 임정요인과 가족들은 가흥으로 이동했다. 취재탐방단은 항주 시기의 첫 임정 청사였던 청태 제2여사를 찾았다. 1910년 무렵 신태여관이라는 이름으로 운영되고 있다가 청태 제2여사로 바뀐 것으로 1967년 군영반점으로 다시 이름이 바뀌었다. 청태 제2여사는 상하이를 떠나 처음으로 타지에 둥지를 틀었던 임시정부 청사였다는 점에서 의미가 남다른 곳이다. 임정의 군무장(지금의 국방부장관) 이었던 김철 선생이 미리 와서 머물고 있었기 때문에 임정의 청사로 사용된 것이다. 지금도 옛 여관의 기능은 그대로다. 군데군데 외관이 훼손되기는 했지만, 내부의 시설들을 단장해서 깔끔한 인상을 준다. 항주에 가면 이곳에서 하룻밤 머물러 옛일을 추체험해보는 것은 어떨까? 인근에 한국독립당 당사가 있던 사흠방과 학사로 임정가족 거주지가 있다. 중국인이 거주하는 공간이지만, 입구에 표석들을 세워 관리하고 있다. 항주 임시정부 관련 유적은 근래 새롭게 단장하여 임정 100주년의 의미를 더 해주고 있다. 청태 제2여사에서 호변촌 청사로 이동한 시기는 명확하지 않지만, 중국 정부의 지원으로 호변촌 장생로 청사로 이동하여 새 둥지를 틀었다.

항주시기 임시정부 자료를 전시하고 있는 호변촌 임시정부 청사(호변촌 23호, 현재 장생로 55호) 구역은 청태 제2여사와 약 1km가량 떨어져 있다. 호변촌은 항주를 대표하는 명소인 서호(西湖)의 옆 장생로 변에 위치한다.

호변촌 청사는 현재 ‘대한민국임시정부항주유적지기념관’으로 복원, 관리되고 있다. 옛 청사 터에 중국 주민들이 살았으나, 항주시 정부와 한국 독립기념관이 노력하여 2007년에 개관하고 2012년에 보완하여 재개관하였다. 1층엔 응접실과 영상물 상영실이 있고, 2층엔 요인 집무실, 침실, 전시자료관이 배치되어 있다. 항주시기 임시정부 활동뿐만 아니라 임시정부 이동 시기 전반에 대한 자료가 전시되어 있다. 2014년에 중국 정부는 항일전쟁 및 반파시즘 전쟁 승리를 기념하는 ‘국가급 항전 기념시설 및 유적지’로 지정하여 관리하고 있다. 호변촌 청사는 1932년 5월부터 1935년 11월까지 약 3년 반 동안 사용했다. 이곳 시절 임정 요인과 가족들은 오랜 역사와 문화가 서려 있는 항주 서호(西湖)에 나가 여가를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항주 독립운동사적지 중에 가장 오랜 기간 머물면서 활동했던 곳으로 해외 독립운동의 구심점 역할을 했다는 점에 의미가 있다.
 

홍구공원 의거 이후 임정의 근거지를 옮겨야 했지만, 독립운동에 대한 관심과 지원도 있었다. 1933년 5월에 김구와 장개석의 만남이 성사되었고, 1934년에 한중합작 군사양성 결정이 있었고, 1935년 가흥 남호에서는 임정요인들의 선상회의가 있었다. 그러나 임정 내부의 노선 차이로 분산된 독립진영의 모습도 드러났다. 부침의 시작이었다. 임시정부는 또다시 진강(鎭江)으로 이동하하였고, 남경(南京)을 오가며 활동했다.

신춘호 방송대학TV 촬영감독·문화콘텐츠학 박사

사진=신춘호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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