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덕(64)씨는 직업계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오랜 시간 동안 자동차 부품 회사에서 일해 온 경험을 바탕으로 국가품질명장에까지 오른 자동차 전문가다.

그는 이같은 삶을 궤적을 직업계고등학교 후배들에게 고스란히 전해주는 데 힘을 쏟고 있다. 멘토링 활동을 통해 직업계고등학교 학생들과 눈높이를 맞추며 후배들의 고민 하나하나까지 신경을 써 준다.이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산업현장교수, 사단법인 ‘빅드림’에서 청소년을 위한 멘토 역할, 지역사회복지관에서 수년간 봉사활동을 이어오는 등 60대에 접어든 나이에도 누구보다 치열하고 바쁜 하루를 보내고 있다.지난 4일 광명의 한 아파트 단지에서 만난 이태덕 씨의 핸드폰은 쉴 새 없이 울렸다. ‘멋진 인생은 자신이 만드는 것이다’라는 인생관을 가지고 있다는 그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국가품질명장과 산업현장교수에 이르게 된 과정이 궁금하다.
"고향이 충남이다. 실업계고등학교를 나왔다. 우리가 살던 시기만 해도 먹고사는 게 급했다. 한 업체에서 용접 일을 시작했다. 이 일을 시작한 후 군을 제대하고 1981년에 자동차 부품회사에 취업을 하게 됐다. 내 인생관이 ‘멋진 인생은 자신이 만드는 것’이다. 남들을 탓하기보다는 내가 알아서 모든 것을 하려고 한다. 그러다 보니까 현장에서 용접 일만 한 게 아니라 자동차 부품이 어떻게 쓰이는지를 생각하고 부품 이름,재질,크기까지 다 외웠다.이렇게 일을 하다 보니 남들보다 눈에 띄게 됐다. 1987년에 감독자로 선임이 됐다. 1990년에 자동차 R&D(연구개발) 부서에서 차량 하체 부분에 대한 연구를 했다. 1997년 11월에 국가품질명장이 됐다. 대한민국의 명장은 2가지가 있다.고용노동부에서 지정하는 명장과 산업통상자원부에서 지정하는 국가품질명장이 있다. 국가품질명장이 고용노동부의 명장과 다른 점은 해당 분야에 대한 이론에서부터 혁신 개혁, 품질관리 능력 등을 갖춰야 한다는 것이다.

자동차 관련 대기업으로 가려고 원서를 쓰기도 했지만 한 곳에서 최고가 되겠다는 생각에 회사에 남게 됐다. 명장이 된 이후 에콰도르 등 해외로 나가 근무하기도 했다. 2007년에 회사에서 퇴직한 이후 2013년까지 자동차 프로젝트 관련 일을 해왔다. 이렇게 일을 이어가던 중 2015년에 산업현장교수로 위촉이 됐다. 산업현장교수는 고용노동부에서 모집하는 것으로 명장 자격은 기본이고 기술사 자격증과 관련 분야 경력이 있어야 할 수 있다. 중소기업들에게 자신이 가지고 있는 숙련된 부분을 가르쳐주는 일을 한다. 이 제도의 취지는 명장들이 국내 기업들을 위해 자신들이 가지고 있었던 기술을 베풀어 기업도 이득을 보고 산업현장교수들도 도움이 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국가적으로 봤을 때도 우리 같은 사람들을 그대로 놔두는 것은 엄청난 손해라 이런 부분을 방지하는 효과도 있다."

-다양한 봉사활동을 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20대에 집사람과 교제할 때 ‘60대까지만 경제활동을 하고 그 후로는 봉사하면서 살자’고 말한 적이 있다. 집사람도 지금까지 봉사한 시간이 8천 시간이나 된다. 지금은 회사에서 퇴직했기 때문에 시간적인 여유가 있다. 예전에 가졌던 생각도 있고 시간 여유도 있다 보니 봉사를 해야 되겠다 생각이 들었다. 당시 아파트에서 통장이 1명밖에 없어 2009년부터 통장을 하게 됐다. 그해 통장을 시작해서 통장협의회장까지 맡게 됐다.통장은 임기가 정해져 있어 실질적인 봉사를 더 하고 싶었다. 그래서 광명 소하노인종합복지관에 점심 식사를 도와주는 일도 시작하게 됐다. 보통 점심에 약 500여 명이 식사를 하고 어버이날 무료 급식때 900여 명의 밥을 퍼준 적도 있다. 지금도 이 봉사활동은 계속하고 있다. 또 ‘민소랑’이라는 봉사단체를 만들어 시에서 운영하는 주간보호센터 어르신들을 위해 노래도 불러주고 웃음 치료도 해 주는 활동을 3년 정도 했다."

-직업계고등학생들을 위한 멘토 역할을 하게 된 이유는.
"이렇게 봉사활동을 이어가던 중 사단법인 ‘빅드림’이라는 곳에서 국가품질명장협회와 업무협약을 체결해 청소년들을 도와주는 봉사자가 필요하다고 해 멘토링 활동에도 발을 들이게 됐다. 어르신들도 중요하지만 자라나는 청소년들도 중요하다.멘토링을 하는 아이들이 불우한 친구들이 많은데 이들에게 재능기부를 하고 있다. 2015년부터 산업현장교수로 위촉돼 활동을 하다 보니까 협의회 내에서 논의를 통해 재능기부를 하자고 결정돼 협의회 봉사단을 모집했다. 다양한 분야의 산업현장교수들이 있으니 80명이 모였다. 내가 멘토단장을 맡고 경기도 기능경기대회나 취업박람회 등에 가서 부스를 만들어 아이들을 상담해주고 있다.

그전에는 직업계고등학교를 보통 공고라고 불렀다. 내가 젊었을 때만 해도 공고 출신들이 기업에 많이 취업하던 시절이었다. 지금도 직업계고등학교 학생들이 잘하고 있지만 그렇지 않은 친구들도 있다. 좌절하고 비관하는 직업계고등학생들에게 태어난 건 주어진 거고 개척하건 '나'라는 식으로 이야기를 많이 한다. 학생들이 자라나는 환경이 본인의 의지에 의해 결정된 건 아니기 때문이다.

박람회 등에서 이들을 상담할 때는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잠깐동안 조언을 해줄 수 밖에 없어 지속적이고 오랫동안 상담을 해줬으면 좋겠다는 마음이다. 한 번은 여름방학 때 아이들을 위해 공장견학을 간 적이 있다. 공장 사무실에 가서 공장장 브리핑을 받고 공장투어도 했다. 공장 견학을 한 학생들이 굉장히 신기해했다. 견학이 끝나고 광명동굴에서 관광을 하고 저녁을 먹은 뒤 귀가했다. 이런 식의 활동을 많이 한다. 한 학생은 밤 11시에 자격증 시험에 대한 질문을 해 온 적도 있어 내 의견을 말해주기도 했다. 자격증을 따놔야 하냐는 질문에는 내 경험을 바탕으로 현실적으로 이야기해 주기도 한다. 기회가 있을 때 따놓는 것이 좋지만 무리는 하지 말라고 말한다. 또 군대를 간다든지 회사에 실습을 나가게 됐다든지 하는 연락도 온다.이렇게 해서 성장해 성인이 되는 아이들을 보면 보람을 느낀다.또 멘토링을 할 때 고등학생들과 눈높이를 맞출 수 있도록 고민을 많이 한다. 학생들의 마음을 열 수 있도록 하는 게 관건이라 어떻게 마음을 열게 할지가 고민이다. "

-직업계고등학교 학생들에게 해주고 싶은말이 있다면.
"내가 외국에서 일할 당시 현지에서 근무하는 외국인들은 우리나라와 지구 반대편에 살고 있었지만 꿈과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단지 내가 밥 먹고 생리적인 활동을 즐긴다면 동물과 다를 바 없다. 어떤 조건에서 태어났든지 인간으로 태어났다면 남을 위한 삶을 살아가야 되지 않겠느냐.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 관리가 선행돼야 한다. 자기 관리가 이뤄지면 그다음에는 내 가족, 지역사회, 아니면 그 누군가를 위해서 내가 열정을 쏟아가며 살아가는 삶을 통해 보람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현재는 어렵고 힘들겠지만 이걸 극복해야 한다. 남들이 하기 싫어하고 힘든 일을 해라. 어차피 할 일이라면 남보다 먼저 나서서 해라. 그러면 반드시 성공한다는 이야기를 학생들에게 많이 해준다. 자기가 스스로 일을 하게 되면 본인도 기분이 좋다. 지금 세대는 기본적으로 생존 걱정을 할 필요는 없지만 우리는 생존을 위한 몸부림을 쳤었다. 그렇기 때문에 나도 지금보다 더 악조건에서 치열하게 노력해서 목표를 삼아 명장에까지 올랐고 이를 계기로 산업현장교수라는 직책도 받았다. 퇴직을 하고도 충분히 보람 있는 일을 하고 사회적으로 좋은 방향의 삶을 살 수 있다. 모두 충분히 할 수 있으니까 자신의 마음 먹기에 달렸다. 나는 안된다는 생각을 버려라. 나도 과거 어렸을 때 힘든 시절이 있었다. 그때 누군가가 건넨 긍정의 말 한마디가 수십 년이 지난 지금에도 뇌리에 남아있다. 나와 상담했던 학생들도 언젠가 과거를 돌아봤을 때 내가 했던 말이 생각날 것이다."

-앞으로의 계획은
"일단 가족들이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또 대한민국 산업현장교수 제도가 국가 차원에서도 계속 유지하고 발전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산업현장교수님들도 더 발전적으로 활동해 국가와 민간인들이 혼연일체가 돼 각자의 위치에서 제 역할을 한다면 국가발전에 큰 원동력이 될 거라고 생각한다. 나도 거기에 일조를 하고 더욱더 열정적으로 활동해서 청소년들이 올바른 길에서 자랄 수 있도록 노력을 하겠다."


김형욱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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