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이 때만큼 결집과 관용이 절실할 때는 없을 듯하다. 한국의 역사는 고비 고비마다 한 마음이 되어 고난을 극복했다. 6·25 동란 시 낙동강까지 밀렸을 때 국가의 위기를 위하여 기도하고 또 월남한 이북 사람들을 포용했던 우리 민족이다. 그런 과거의 정신을 되뇌어 보고 싶다. 백성을 ‘나라의 존재’로 보았던 세종 치세만큼 다양한 인재들이 포진했을 때가 있었을까. 유비를 보필했던 제갈량 이상으로 출중했던 책사와 양신들이 많았기에 세종을 청사에 빛나게 했다. 국정의 큰 그림을 그리는 통찰력 혜안의 대가 황희 정승. 세밀한 분야의 능력자 허조. 뿐만 아니라, 어전에서 목숨을 내놓고 직언한 충신을 아우르던 세종. 기록에 의하면 화를 19번밖에 안 낼 만큼 포용력이 대단했던 왕이었지만 까칠했던 대사헌을 하루 동안 유치장에 구금시키기도 했다. 그런 신료들은 사심이 없었기에 품고 갔다. 그 시대는 관료사회의 부패가 적은 사회였고, 농경생산 확대와 주거환경이 크게 개선되어 태평시대를 구가했고 토론환경이 정착된 문화이기도 했다. 결단을 내릴 때까지 끊임없이 토론했다는 사실은 이 시대가 교훈을 삼아야 되지 않을까. 세종이 주견이 분명하고 균형 감각이 있는 판단과 행동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심지어는 지방 미관말직에 해당하는 서리들을 오늘날로 말하면 국정회의 멤버로 참석시키기도 했다. 하향식 통로가 아니라 상향식 언로가 활발한 국정운영이 가능했던 것이다. 정조 시대에도 각 당에서 배출한 다양한 관료들이 있어 한 마음 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신하들에게 술잔을 들면서 ‘과거를 잊어버리고 미래로 나아가자’고 강조했다. 비단 이런 행태가 세종시대, 정조 때만 국한했을까 결코 그렇지 않다.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 때의 얘기다. 4대 황제인 강희제는 근심이 얼굴을 떠날 줄 몰랐다. 그럴 줄 수밖에 없는 것이 청나라가 명나라를 점령하면서 한족에게 자행한 많은 살상은 다수인 한족들에게 반감을 일으켰다. 오랜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이렇다. 전국에 65세 넘은 노인들을 모아 경로잔치를 열자는 것이다. 사흘 동안 108가지나 되는 전국의 진미를 맛보게 하고 화합을 하자는 취지였는데 결론은 대성공이었다. 고향으로 떠나는 노인마다 이구동성으로 "오랑케인줄 알았는데 노인을 잘 섬기는 황제였구먼"하면서 칭찬 일색이었다. 만주족과 청에 대한 반감이 눈 녹듯이 사라졌다. 묵은 숙제를 말끔히 처리한 강희제는 탕평책을 시행함으로 현군으로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포용과 관용을 거론할 때 링컨을 빼놓을 수 없다. 4년 동안의 치열한 남북전쟁 끝에 북군의 승리로 끝났다. 하지만 이것으로 끝난 게 아니었다. 남북 간의 갈등이 최대의 난관이었다. 남군들이 항복했을 때 그들의 자존심을 한껏 높여 주었다. 고개 숙여 들어오는 장병들에게 ‘받들어 총’으로 그들을 따뜻하게 맞이했고 희망하면 원래 계급대로 군 복무까지 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그뿐 만 아니라 남군의 상징적인 로버트 리 장군 역시 워싱턴대학 총장으로 명예로운 인생을 살았으며 링컨의 남부 재건 계획 또한 남부인 들의 마음을 열기에 족했다. 이로써 남북갈등을 조기에 봉합함으로써 화합 정치의 금자탑을 세웠다.

국가마다 트렌드 문화가 존재한다. 프랑스는 tolerance. 영국은 젠틀, 화는 일본이 추구하는 덕목인데 우리 문화는? 딱히 정의할 만한 게 보이질 않는다.

우리는 지능도 있고 근면도 있다. 거기다 열정도 있다. 그래서 세계 경제 13위에 등극해서 세계인들에게 부러움을 사기도 했다. 이참에 포용과 관용을 우리 트렌드문화로 삼으면 어떨까 싶다. 이념적으로 분열된 조국이 별 생산적이지 않은 문제로 갈등하기엔 갈 길이 멀다. 이런 점에서 ‘삼겹줄은 쉽게 끊어지지 않느니라(전도서 4:12)’라는 성경말씀은 우리에게 큰 교훈을 주고 있다.

안승국 관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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