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고유의 글자가 없던 문화적 암흑기를 세종대왕께서 28자 곧 자음 17자, 모음 11자라는 창의적 글자를 세상에 만들어 내놓으면서 우리 민족은 문화민족으로 등극했습니다. 그러나 창제 이후에도 온 국민과 관청에서 훈민정음을 전면 사용하지 못하고 중요한 모든 문서는 한문 위주의 표기였습니다.

그리고 훈민정음을 당당하게 훈민정음, 정음이라고 하지 못하고 한자를 진서(眞書)라 하고 우리 훈민정음은 ‘언문, 반절(反切), 이언(俚言), 암클(부녀자들이나 쓰는 글이라는 뜻), 뒷간글’ 등으로 항간에 떠도는 저속한 말의 수준으로 표현했습니다.

한글이 우리 나라글로 자리잡은 것은 1894년 대한제국 칙령 1호로 ‘법률명령은 다 국문(國文)으로 본을 삼고 한문번역을 붙이며 혹 국한문을 혼용한다.’라는 한글 전용 법령공포이후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그 때 까지도 ‘국문(國文)’이라 부르던 우리 글자를 주시경 선생께서 1913년 ‘한글’이라 이름지었는데 한글의 ‘한’은 ‘하나’ 또는 ‘큰’을 의미하여 우리 글자의 권위를 세웠습니다. 참으로 뛰어난 창의적 작명이라 하겠습니다.

"눈물 머금은 ‘주보따리’는 언제나 동대문 연지동에서 서대문 정동으로, 정동에서 박동으로, 박동에서 동관으로 돌아다니셨는 스승은 교단에 서시면 언제든지 용사가 전장(戰場)에 다다른 것과 같은 태도로써 참되게, 정성스럽게, 뜨겁게, 두 눈을 부릅뜨고 학생들을 응시하고 거품을 날리면서 강설(講說)하셨다. 스승의 교수는 말 가운데 겨레의 혼이 들었고 말 밖에도 나라의 생각이 넘치었다."

외솔 최현배 선생의 스승 주시경 선생에 대한 일화 한 토막입니다.

주시경(周時經 1876~1914) 선생은 1907년부터 국어, 지리, 역사교육을 통한 민족 정체성 확립을 위해 국어 강습소를 설립하였습니다.

선생께서는 공옥(攻玉), 이화, 숙명, 진명, 기호, 협성, 보성, 배재, 중앙, 경신 등 20여개 학교에 국어와 역사와 지리를 가르치셨고 학습교재를 보자기에 싸 가지고 동분서주 다니셨다하여 이 때 얻은 별명이 ‘주보따리’선생이라고 합니다.

황해도 봉산군에서 태어나신 선생은 11살 되던 해 서울 남대문에 사는 중부(仲父) 주학만(周鶴萬)의 양자로 서울에 왔습니다. 양아버지의 도움으로 서당공부도 하며 우리말과 글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1894년 배재학당에 정식으로 입학하여 공부를 하였고 그 후 서재필 박사를 만나게 되고 1896년 독립신문 창간에 참여하여 총무 겸 국문담당, 편집 교정요원으로 국문전용, 국문 띄어쓰기, 쉬운 국어쓰기를 실천하였습니다.

20세 약관의 나이에 선생께서는 서재필, 이승만, 신흥우 등 배재학당 교직원과 학생들이 중심되어 조직 된 협성회에서 협성회보 저술위원의 간부로 민중을 계몽하고 봉건적 악습타파를 주장하며 독립협회 간부로도 활약을 하였습니다.

12월 독립협회가 해산되자 선생께서는 고향으로 피신하였습니다.

이 때 5년간 국문 연구를 하여 정리한 것이 ‘국어문법’이었습니다.

선생은 윌리엄 B.스크랜턴 선교사로부터 영어와 자연과학을 배웠고 한성외국어 학교에서 일어, 청국어를 흥화학교에서 측량술과 도해법도 배웠습니다.

선생께서는 ‘국어문전음학’에서 ‘오늘 날 나라의 바탕을 보존하기에 중요한 자기 나라의 말과 글을 이 지경을 만들고 도외시한다면, 나라의 바탕은 날로 쇠퇴할 것이요 나라의 바탕이 날로 쇠퇴하면, 그 미치는 바 영향은 측량할 수 없이 되어 나라 형세를 회복할 가망이 없을 것이다. 이에 우리나라의 말과 글을 강구(講究)하여 고치고 바로잡아, 장려할 것이 오늘의 시급히 해야 할 일이다.’라고 우리말 바로잡아 세우는 간절한 염원을 피력했습니다.

따라서, 선생께서는 1906년 이후 ‘국어문전음학’, ‘국문초학’, ‘국어문법’ 등 계속 발간하여 국어의 체계화, 표의주의 철자법, 한자어의 순화, 한글 풀어쓰기를 주장한 국어학의 개척자인 동시 국권회복운동의 정신적 역량을 키웠습니다.

그리고 최현배, 장지영 선생 등 수많은 제자들을 길러 오늘날의 국어학을 발전시키게 하신 분입니다.

비록 38세의 젊은 나이로 별세하셨지만 주시경 선생이 남기신 업적은 우리 역사에 몇 페이지 몇 줄로 기록될 분이 아니라고 하겠습니다.

1930년 통계로 취학률 24%, 문맹률 78%가 되었던 상황에서 후학 한글학자들이 우리말 사전편찬 표준어 제정 등은 높은 차원의 애국, 애족, 독립운동이라 하고 그 가장 앞에 서 있던 분이 주보따리, 주시경 선생입니다.

유화웅 시인,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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