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4월, 중국 상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세워졌다. 임정은 1932년 윤봉길 의거를 기화로 일제의 추적을 피해 고난의 이동을 감내했다. 약 1만3천 여 리, 중국 전역을 유랑하듯 임시정부의 거처를 옮겼고, 숱한 고난의 시간을 이겨냈다. 중경에 정착한 임정은 1941년 한국광복군 총사령부를 창설하여 군대를 양성했고, 미국의 도움으로 특수공작에 매진하며 국내 진공을 도모했다. 1945년 8월, 일본의 패전과 항복 선언. 임정 수립부터 광복을 맞이하기까지 27년의 세월을 견뎌낸 임정 요인과 가족들은 진정 기쁨에 겨워해야 할 광복이었지만, 느닷없는 광복을 받아들여야 했다. 그리던 고국으로의 환국 논의가 진행되었고, 임정 요인의 가족과 한인들은 또다시 버스와 배편으로 남경-상해를 거쳐 고국으로 돌아왔다. 상해를 떠나 중경까지 이동했던 8년여의 장정도 고난의 연속이었지만, 중경-기강-남경-상해-부산으로 이어지는 환국의 여정도 만만치 않았다. 환국 비행기에 오른 김구 일행의 상해를 방문 동정과 임정 가족들의 환국을 위한 대이동 과정을 따라가 보자.
한국광복군 창설 등 국내 진공을 위한 노력
1940년 9월에야 중경에 정착한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청사의 이동이 몇 차례 있었다. 양류가, 석판가, 오사야항에서 칠성강 연화지 38호 청사로 옮겨 활동하다가 광복을 맞았다. 중경의 도시개발로 연화지청사를 제외한 나머지 옛 청사들은 옛터만 확인될 뿐, 실체는 모두 사라지고 없다. 연화지 청사는 1945년 1월부터 환국 길에 오르던 11월까지 청사로 사용했다. 현재 ‘대한민국임시정부구지진열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중경 임시정부는 1940년 5월에 ‘한국광복군 편련 계획 대강’을 수립, 국민당 장개석 군사위원장에게 제출, 장개석은 "한국광복군이 중국 항전에 참가해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이를 비준했다. ‘한국광복군 창설위원회’를 설립한 임정은 가릉빈관에서 ‘한국광복군 창설 성립 전례식’(9월17일)을 하고 지청천 장군을 광복군총사령관으로 임명했다. 태평양전쟁(1941년)이 발발하자 그해 12월 일본에 대해 선전포고를 했고, 연합군의 일원으로 버마 탈환 작전 등 동남아 전장에 광복군을 파견했다. 한국광복군의 작전권은 중국국민당에 있었으나 1944년 8월 임시정부로 이관되어 독자적 군사행동을 수행할 수 있게 되었다.
1941년 봄, 광복군과 달리 독자적으로 움직이던 조선의용대원들이 대거 공산당 휘하로 이탈하면서 화북지역 일대로 떠났다. 중국 정부의 김원봉에 대한 신임이 약화 되었다. 조선의용대는 해체되었고, 화북으로 가지 않은 김원봉을 비롯한 일부는 광복군 제1지대로 편입되었다. 김원봉은 부사령관으로 임명되었고, 이를 계기로 임시정부에 참여하지 않았던 조선민족혁명당 등 각 당파들의 임정 참여로 김구계열과 김원봉 세력의 연정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김원봉은 임시정부 군무부장으로 활동하며, 이후 국내 환국 시 2진으로 합류했다.
1943년 독일군이 투항하고 연합국의 승리가 계속되었다. 카이로에서는 미국, 영국, 중국 세 나라의 지도자들이 회담을 열어 전후처리 문제를 논의했고, 한국의 독립에 관한 결정했다. 1944년 미국 해외 전략사무국(OSS)은 미군의 한반도 상륙작전의 성공을 위해 한인 지하공작대를 훈련시켜 잠입시키는 방안을 마련하고 학도병 출신을 포함한 광복군을 훈련 시켰고, 11월에 제1기 졸업생을 배출했다. 1945년에는 OSS 특수작전 훈련을 받은 졸업생이 배출되어 ‘광복군 국내 정진대’로 명명되어 국내 침투를 기다리고 있었다.
꿈에나 그리던 광복, 준비없이 찾아와
1945년 8월 10일 저녁 8시, 중경의 각 방송과 신문들이 긴급 타전했다. "일본이 무조건 투항한다"는 뉴스를 내보낸 것이다. "희소식이라기보다는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일이었다. 수년 동안 힘써 참전을 준비한 것이 모두 허사로 돌아가고 말았다"(백범일지) 김구와 지청천은 서안에서 ‘일본 투항’의 소식을 맞았다. 8월 10일 섬서성 주석 축소주(祝紹周)의 초대로 저녁 식사 중 일제의 항복 소식을 전해 들은 것이다. 축소주 주석을 만나기 전에 이미 서안에서 OSS와 광복군 정진대 대원들을 국내로 진입시켜 적후 공작을 전개하기로 합의했던 터였다.
느닷없는 일본의 투항은 혼란스러웠다. 일본의 투항은 조국의 광복을 말하는 것이니 기쁘기 한량없는 일이었지만, 국내 진공을 통해 전쟁에 기여하여 연합국의 일원으로 입지를 다지려 했던 임시정부의 입장으로선 ‘기뻐도 마냥 기뻐할 수 없는’ 일임이 분명했다. 조국의 광복은 그렇게 준비 없이 찾아왔다.
임시정부는 중국 정부와 미국을 상대로 교섭을 진행하고, 환국을 위한 채비를 하였다. 국무회의를 열어 환국 일정과 대상을 선별하였고, 임정 요인 및 가족, 한인들의 귀국 여정을 정리했다. 중경에서 상해로 가는 항공은 중국 측에서 제공했다. 수송기의 탑승 수용인원이 적으므로 주요 요인들의 환국 인원은 김구를 비롯한 1진과 김원봉 등의 2진으로 나누었다. 환국 노선은 중경에서 상해, 상해에서 국내로 구분하고 중국 측에서 중경-상해간 교통편을 제공하고 미군은 상해-국내간 교통편을 제공하기로 했다.
귀국을 앞두고 임시정부는 1945년 9월 3일 국무회의 명의로 ‘당면정책 14개 조’를 발표했다. ‘국내외 동포에게 고함’이라는 제목으로 김구 주석 명의의 성명서에는, 민족의 갖은 고난과 절절한 노력, 선열들의 보귀한 열혈의 대가, 중국, 미국, 소련, 영국 등 동맹군의 전공 때문에 오늘의 광복이 가능했음을 밝혔다. 아울러 조국의 완전한 독립과 민족의 단결을 완성하며, 국제간의 안녕과 인류의 평화를 위해 노력하겠다는 메시지도 남겼다. 특히 향후 계획으로, 환국-각계 대표자회의 소집-과도정부 수립-전국 보통선거 실시-정부 수립 등의 정부출범 방안을 제시했다.
중국국민당의 임시정부 환송 모임이 10월 24일 상청화원에서 열렸고, 한중문화협회와 민간단체들의 환송연회가 이어졌다. 중국공산당의 환송 축하연도 있었다. 10월29일에 김구 일행은 장개석을 찾아가 감사를 표했다. 그동안 한국의 독립운동을 원조해준 데 대한 감사의 인사이자, 환국에 필요한 경비 1억원과 미화 20만 달러를 지급해준 것에 대해서도 감사의 뜻을 전했다. 장개석은 임정 1진이 떠나기 전날인 11월 4일, 임시정부 인사들을 환송하는 다회(茶會)를 열고 "빠른 시일에 독립을 완성하기를 기원한다"는 덕담을 했다.
임시정부는 남파 박찬익과 규운 윤기섭 등을 중국 정부와 중국 내 한인들의 후속 귀국과 안전등 제반 문제를 처리할 대표단, 즉 ‘주화대표단’을 남기고 상해로 떠났다.
13년 전에 떠났던 상해의 공기를 다시 마시다.
중국 국민당 정부에서 제공한 비행가 중경 양자강비행장을 이륙했다. 11월 5일이었다. 비행기 2대에는 김구를 비롯한 임시정부 요인들 외에도 임시정부 기록물 13상자가 실려있었다. 오후 늦게서야 상해 외곽의 강만(江灣) 비행장에 도착했다. 지금의 상해 전철 10호선 종점 신강만역과 삼문로역 부근이 강만비행장 자리로 알려져 있다. 지금은 신강만성이라는 주택단지로 변하여 옛 비행장의 흔적을 찾을 길이 없다. "13년 전에 떠났던 상하이의 공기를 다시 호흡하게 되었다"고 소감을 피력한 김구는 1천여 명의 환영인파가 흔드는 태극기 물결로 들어갔다. 당시 기자회견에서 감회를 밝힌 내용을 보면, "나는 13년 전에 상하를 떠날 때 홀로 南市(프랑스조계 중국인 거리) 길가에서 미국인 피치부부 두 사람의 도움을 받아 새벽에 출발했다. 그러나 오늘 이렇게 여러 동포를 대할 때 내 가슴은 구름과 같이 뭉게뭉게 한다."(대한일보, 1954.11.6.)라고 표현했다. 윤봉길 의거 후 상해를 탈출하던 당시를 회고하며 가슴 벅찬 감격을 맞는 감회였다.
김구와 임정 일행은 곧장 홍구공원으로 향했다. 오후 4시 30분 경이었다. 홍구공원은 혼잡했다. 김구 일행을 좀 더 가까이 보려는 인파들로 인산인해였다고 한다. 교민들은 광복군 악대의 반주에 맞춰 ‘애국가’를 몇 번이나 불렀다고 했다. "(전략)광복군 군악대의 반주에 맞춰 애국가를 몇 번이고 부른 후에 김구 선생이 높은 축대에 올라서서 다음과 같은 요지의 말씀을 들려주셨다. (중략) "금후 우리 임시정부는 국가에 들어가 새 나라를 세우고 새 민족을 갖도록 주력할 것이다"라고 절규하시였다.(중략) 우리는 옛날 홍구공원에서 우리의 선열 의사에게 백천 대장이 죽는 것을 보았고, 오늘은 바로 이 자리에서 우리의 애국지사가 월계관을 쓰신 것을 보고야 말았다. 이런 것은 한 개의 우연이 아니라 기필코 있어야만 할 오늘의 천칙임을 깨닫게 되었다."(대한일보, 1945.11.6.) 당시 김구가 홍구공원 환영식장에 올라가 연설하는 광경을 대한일보가 묘한 장면으로 ‘백천 대장이 죽고 김구가 월계관을 쓴 것을 천칙(天則)’이자 ‘기적적인 역사’라고 평했다. 상해 홍구공원은 노신공원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노신의 동상과 묘역 앞으로 너른 잔디밭이 조성되어 있다. 김구일행의 환영행사가 열렸던 장소이자 윤봉길 폭탄 투척 의거가 있었던 현장이다. 김구와 윤봉길, 그들의 대의가 살아있는 현장에는 지금도 한국인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고 있다.
홍구공원 환영 행사를 마친 김구와 임정 요인들은 시내 한구로 740호의 양자호텔(揚子飯店)로 이동했다. 김구를 비롯한 수행원은 양자호텔에 투숙했고, 임정 요인들은 원동호텔(遠東飯店)로 분산되어 숙소를 잡았다. 당시 상해시 정부의 특별한 배려로 당시로선 최신식호텔인 이곳에 머물 수 있었다. 1934년에 문을 연 양자호텔은 지금의 양자정품호텔(揚子精品飯店)로 여전히 옛 모습을 유지한 채 상해 인민공원 부근에 남아 있다. 필자는 양자호텔의 안을 들어가 당시 호텔 내부를 확인한 바 있다. 로비에서 2층은 나선형 계단이 고풍미 있게 있었고 2층 커피숍의 분위기는 과거 상해의 모던 풍이 드러났다. 13년 만에 다시 돌아온 상해의 밤을 김구와 임정 요인, 수행원들은 어떤 마음으로 보냈을까?
김구는 상해 방문 후 많은 일정을 소화했다. 다음날인 11월 7일은 개천절(건국기원절)이었다. 광복후 처음 맞는 개천절은 남다른 감회가 있었을 것이다. 임정에서는 개천절 행사를 잘 챙겼었다. 광주 불산, 삼수에서 주강을 따라 유주로 향하던 ‘물 위의 정부’ 시절에는 선상에서 맞이했던 개천절이기도 했다. 김구는 대광명(大光明)극장에서 열린 개천절 행사에 참여했다. 1927년에 개장한 ‘원동 제1의 극장’ 답게 지금도 현대 영화관으로 성업 중이다. 대광명극장은 1945년 11월 17일 순국선열의 날 기념식, 1946년 3.1절 경축식 등이 열렸던 곳이기도 하다.
상해 교민회에서도 임정 요인들을 환영하는 모임을 장안사로의 금문호텔(金門飯店)에서 열었다. 남경서로 108호에 있는 금문호텔에 상해의 교민 100여명과 임정 요인 20여 명이 참석하여 성황을 이루었다고 한다. 금문호텔과 대광명극장 역시 과거의 위치에 옛 모습을 유지하고 있으므로 이곳을 찾는 이들은 당시의 김구와 임정, 상해 교민사회의 행적을 상기할 수 있다. 김구는 교민사회가 중심이 되어 윤봉길 의사의 동상을 건립하길 바란다고 지시하기도 했다.
순국선열의 날 행사를 끝으로 김구는 18일간의 상해 일정을 마쳤다. 미 군정 측과 국내 귀국 자격을 놓고 교섭하는 일로 일정이 늦어져 11월 23일에야 미군정이 제공하는 수송기를 타고 고국으로 향하였다. 1진 15명, 2진 22명이었다. 여의도공원에는 당시 수송기와 같은 기종(C-47)이 전시되어 있다.
임정 가족들의 귀국, 버스로 배로 다시 수 백km
중경과 토교 동감의 한인들은 1946년이 되어서야 환국대열에 합류했다. 임정 가족과 한인들의 환국 이동 경로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은 기록으로 남아 있지 않아서 그 노정을 파악하기란 것은 쉽지 않다. ‘장강일기’, ‘제시의일기’, ‘임정의 품 안에서’와 같은 회고록을 통해 대략의 경로를 파악할 수 있다. 정정화의 ‘長江日記’에 따르면, 100여 명의 임정 가족들, 그리고 중국군 포로가 되었다가 돌아온 일본군 위안부 출신 여인 10여 명이 동행했다. 사천성 중경을 출발한 버스는 기강의 한인들과 합류하여 호남성 방향을 향해 동쪽으로 길을 잡았다. 육로와 수로(양자강)를 이용하여 상해까지 이동해야 하는 대이동이었다. 가는 여정의 고달픔은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피난을 위한 이동이 아니라 광복의 셀레임을 안고 이동하는 차이가 있었다.
정정화의 ‘장강일기’ 기록을 참고하여 상해까지의 이동 경로를 정리하면, 버스를 이용한 육로구간은 중경-기강-백마-팽수-금강-완릉까지 이고, 완릉에서 목선으로 갈아탔다. 완릉은 완강이 동정호와 합류하는 곳이어서 남경으로 가기에는 뱃길이 수월했을 것이다. 도원은 도연명(陶淵明)의 도화원기(桃花源記)로 널리 알려진 곳이다. 도원의 빼어난 산수를 감상하기도 했다. 완릉-도원-상덕까지 목선을 이용했고, 상덕에서는 증기선이 목선을 끌었다. 상덕에서 악양까지는 4일간 동정호(洞庭湖)를 지나는 동안 배 위에서 생활하며 이동했다. 거대한 담수호인 동정호는 중국의 저명한 시인 묵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은 곳인데 다가 조선의 문인들 또한 동정호를 심상(心象) 지리 공간으로 동경하고 있을 정도로 유명한 곳이었다. 목선 위의 임정 가족들은 선창에서 호수의 찬바람과 한기를 무릅쓰고 이동했다.
한구에서는 몇몇 한구 교민들이 분산해서 임정 가족들을 보살피기도 했다. 기선으로 한구를 떠나 남경 하관(下關)에 도착한 정정화 가족은 다시 열차를 이용하여 상해 갑북역(閘北站)에 도착했다. 일부 가족들은 배를 타고 남경에서 상해로 이동하였다. 임정 가족들은 상해에서 약 2개월여를 머물렀다. 정정화는 서가회 만국공묘(현 송경렬능원)를 찾아 ‘동농김가진선생’묘역에 참배하기도 했다. 이들이 상해를 떠나는 고국행 여객선에 몸을 실은 건 1946년 5월 9일이었다. 미국이 제공한 LST수송함은 사흘 뒤 부산항에 도착했다. 부산항에서 콜레라 환자 발생을 이유로 사흘을 보내다 DDT검역을 마치고 부산항으로 이동하여 서울행 화물차에 다시 몸을 실었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고난을 감내한 임정 가족, 독립운동가 들의 환국은 이런 모습을 하고 있었다. 환국 이후, 임정과 가족들의 앞날은 더욱 불투명했다. 지난 했던 임정 27년의 항일 여정보다 더 엄혹한 시련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신춘호 방송대학TV 촬영감독·문화콘텐츠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