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떠들어도 꿈쩍하지 않는 집단이 있다.

그 집단에서 법치주의가 무너지고 있다.

법은 지키라고 만들어진 규칙이라는 걸 삼척동자도 다 알고 있다. 하지만 요즈음 국회는 온통 변칙적 편법으로 아무런 죄의식(?) 없이 악용하는 사례가 비일비재하게 통용되고 있다. 법은 무엇인가, 인간적으로 통제되지 않을 때 강제로 집행하는 행위로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을 만드는 국회에서 교모하리만큼 치밀한 방법으로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위해 궤변으로 합리화 하면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인양 국민에게 동의를 구하는 우수꽝스런 현상이 연일 난장판처럼 펼쳐지고 있다.

문제는 진정성이다. 왜 국민을 볼모로 잡는가, 툭하면 국민, 국민, 하면서 권력의 연장을 위한 수단임을 숨기고 있다.

대다수의 국민은 특별히 니 편도 내 편도 아니다. 그저 현재의 생활에 큰 불편없이 부당한 대우만 받지 않으면 만족한다. 행복의 지수가 학술적으로는 어쩌니 저쩌니 해도 그 행복의 지수가 정치권에 의해 짜증을 유발시킨다면 마치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본 것처럼 괜히 심기만 거슬려진다.

국가나 조직에는 리더자가 없을 순 없다. 그 리더자는 조직을 대표하여 대신 일을 해 달라는 것이지 과다한 권력을 부여한 건 아니다. 달리 생각해보면 권력이라는 말 자체가 위압감을 주는 용어이다. 왜 권력인가, 어감이 주는 뉘앙스가 고압적이고 강압적인 느낌으로 다가온다. 정치인은 번외자가 아니다. 국민의 한 일원이다. 그런데 그것을 망각하고 주어진 지위를 남용하여 힘의 논리를 펴고 있는 건 아닐까, 숫자로 밀어 부치는 어처구니 없는 현상보다 타협하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 더 이상 부연할 필요가 없다. 51%가 웃고 49%는 울어야 하는가 경제와 게임은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국민이 행복할 권리는 51%의 의미가 없다. 타협과 절충은 없고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는 놀음판의 패처럼 패놀이를 해서는 안된다. 그것이 심화되면 결국 극단적 논리를 택하는 길로 가게 된다. 극단적 논리는 약자의 마지막 항변이다. 그 항변이 조롱으로 비춰지고 우롱당할 때 뒷켠에서 숨죽여 울어야 하는 소시민은 누굴 붙잡고 하소연해야 할까, 이겼다고 환호성을 지르고 권력을 쟁취하여 현실에 안주하고픈 그 속성이 똬리를 틀고 감춰져 있다면 그것도 모르는 국민이 바로 우롱 당하고 있는 것이다.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은 세상이다. 인간이 누려야 하는 삶은 유한하다. 그 유한의 길 속에 행복을 누리다 가는 것이 작은 소망이다. 거창한 구호나 거창한 계획이 아니더라도 소박한 일생을 꿈꾼다. 그 길에서 정치권이 행하는 머리 아픈 현상들이 일상의 평온함을 깨트리지 말아야 한다. 머리를 감싸 안고 어떻게 하면, 보다 넉넉하게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이 있을까 연구하고 세계의 시장에 뛰어들어 국부를 창출해야 하는 일을 뭘까 고민해야 한다. 한동안 대한민국이 샴페인을 너무 일찍 터트렸다는 말이 유행처럼 오르내릴 때가 있었다. 현재에 너무 만족하지 않고 백의 민족의 선한 혈통을 이어준 조상들의 빛난 얼을 되살려 인간답게, 인간적인 삶이 영위되도록 정치권은 깨알 같은 일부터 차근차근 행복의 지수가 뭔지를 제대로 파악하여 내실 있는 국회, 행복지수를 높이는 국회로 새로 탄생되어 인정받는 선량, 존경받는 지도자로 탈바꿈 하는데 전력을 다할 때 국민으로부터 박수가 터쳐 나오리라 본다.

제발, 부탁합니다. 신경 좀, 그만 건드리세요.

김현탁 한국현대문학연구소장 문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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