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가 시작된 지 벌써 보름이 지나고 있는 이 시점에, 새해에 다짐했던 새로운 결심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자연스럽게 돌아보게 된다.

매년 새해를 시작하며 새로운 결심을 하는 이유는 아마도 우리가 변화를 꿈꾸기 때문일 것이다. 아직까지 살아온 삶을 뒤로 하고 완전히 새롭게 시작할 수는 없는 것일까? 그런데 삶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 새로 시작하려는 마음과는 달리, 삶은 나를 살아온 그 틀 안으로 끊임없이 끼워 맞추려고 한다. 정말 새로운 시작은 불가능한 것일까?

우리가 사는 ‘소비사회’는 끊임없이 새로운 제품을 만들어 소비자의 마음을 끌려고 한다. 프랑스에서 유학할 때 놀랐던 것은, 그곳 사람들은 유행에 민감하지 않고 각자 나름의 방식을 고수하며 살고 있다는 것이었다. 프랑스라는 국가가 지금까지 발전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신기술을 추구하면서도 역사와 전통을 중시하여, 옛것과 새것이 서로 조화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요즘 들어 한국에서도 역사와 전통, 문화유산에 대해 관심이 많아졌지만, 전반적으로 한국 사람은 과거보다는 미래를, 헌 것 보다는 새 것을 좋아하는 것 같다. 유산슬의 ‘사랑의 재개발’ 노랫말 가사처럼 한국 사람들은 ‘싹 다 갈아엎어’버리는 것을 원하는 것은 아닌지? 우리나라만큼 새로운 제품, 신기술에 민감한 나라도 없는 것 같다. 핸드폰도 3년 정도 쓰면 오래 쓴 것이니 새로운 제품으로 바꾸라고 권유한다. 그런데 그렇게 새로운 제품이 쏟아져 나와도 채워질 수 없는 것이 있으니, 첨단 과학기술의 발달의 흐름 속에서도 사라지지 않는 영혼의 목마름일 것이다.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는 ‘호모 데우스’에서 21세기를 주도할 새로운 기술이 가져올 혁명적 변화에 대해 말한다. 기술력의 향상으로 인간이 죽음의 한계를 넘어 ‘신성(神性)’을 추구할 것이라도 한다. 새로운 기술이 가져올 놀라운 변화가 기대도 되지만, 과연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해줄 것인지는 미지수다. 신기술이 인간의 수명을 수백 년으로 늘리고 많은 질병으로부터 해방시켜줄 지라도 인간 삶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줄 수는 없을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더욱 많은 과학적, 윤리적, 사회적, 경제적 문제가 생겨나고 있다. 그리고 그 문제에 대해 기술과 정보가 결코 답을 주지 못함을 목도하고 있다. 가령 자율 자동차 출현으로 인해 제기되는 윤리적인 문제에 대해 (사고가 났을 때 누구에게 책임을 돌려야 하는가?) 기술력도 빅데이터도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한다. 윤리적 문제 앞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기술이나 정보가 아니라, 그 문제의 핵심을 꿰뚫어보고 그에 대한 해결책을 찾는 식별력이다.

과학기술적 세계관에 파묻혀 살 때 우리는 종종 삶의 다른 차원, 다른 소중한 가치를 잃고 살아가게 된다. 인간을 인간답게 하고, 인간 삶에 의미를 부여하고, 인간을 완성으로 이끄는 것은 무엇인가? 과연 누가 우리에게 그 차원에 대해 이야기해줄 수 있을까?

굳이 인문학이나 종교에 의존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과학기술의 영역을 넘어서는 삶의 보다 깊은 차원을 일상에서 늘 경험하며 살아간다. 인간 사이의 만남이 이루어지고 관계가 맺어지며 서로간의 신뢰가 싹틀 때, 서로가 그저 스쳐 지나가는 ‘남남’이 아니라 소중한 ‘인연’으로 발전할 때, 신뢰와 사랑, 우정의 관계 안에서 각자는 자신이 그저 나타났다 사라지는 우연적 존재가 아닌 소중하고 필연적인 존재임을 깨닫는다. 이처럼 인간 사이에 주고받는 신뢰와 사랑은 우리 삶을 ‘유용성’의 측면이 아닌 ‘무상성’의 측면 곧 기대하지 않고 사랑과 존재를 거저 주고받을 수 있는 초월적 차원으로 고양시켜준다.

인간 삶에는 물질적인 것, 기술적인 것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인격적 신뢰 관계만이 해결해줄 수 있는 것들이 많이 있다. 누군가 나를 믿어 주고 끝까지 그 자리에 나와 함께 해줄 것이란 믿음, 그것은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고 희망의 불꽃을 피워준다. 인간 삶에 가치를 부여하는 관계, 신뢰, 희망, 사랑, 시련 속에서의 성장, 인내, 끈기, 항구함 등이다. 이들은 인공지능이나 빅데이터가 우리에게 줄 수 없는, 인간에게 고유한 초월적 가치들이다.

아무리 신기술이 인간의 미래를 장밋빛으로 약속한다 해도 인간 삶에서 가장 중요한 이들 가치는 대치하지 못할 것이다. 이제 가던 길을 잠시 멈추고 자신의 삶을 돌아보면 어떨까? 인간 삶에서 가장 힘들게 하는 것, 가장 행복하게 하는 것, 바로 인간 사이에 주고 받는 신뢰 관계가 아닐까? 신뢰를 통해 나의 삶이 한결 더 빛나고 더 고귀하며 품위 있는 것이 된다고 믿을 수 있을까? 새해를 시작하며 사람들과 어떤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지 돌아보면 어떨까? 나는 얼마나 많은 신뢰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가? 나를 진정 믿고 바라고 사랑하며 늘 그 자리에서 나를 응원하고 지지해주는 가족이, 친구가, 이웃이 존재하는가?

한민택 수원가톨릭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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