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전방 초소에서 병사가 적들이 오는지 ‘전방’ 경계를 하지 않고 상급자가 순찰을 도는지 ‘후방’ 경계를 하고 있다면 어찌 될까? 선생님이 학생 한명 한명을 관찰하고 대화하여 학생기록부를 작성하지 않고 학생더러 써오라고 하거나 아무렇게나 적는다면 어찌 될까? 항공기나 선박 정비사가 체크리스트 항목별 부품들을 자기 소지품처럼 살피지 않는다면 어찌 될까?

열에 아홉은 당장 별 일 없을 것이다. 사고가 나기 전까지는... 감사를 하기도 하고 교육도 시켜보지만 당사자에게 직업의식이 결여되어 있다면 별 소용이 없다. 각자 이유는 있다. 격무에 시달린다든가 근무여건이 열악하다든가 급여가 낮다든가... 다만, 사고가 반복되면서도 앞으로는 나아질 거라는 확신이 들지 않는다는 사실에 좌절감이 느껴질 뿐이다.

일본 정부가 반도체 디스플레이 핵심 소재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면서 새로이 부각된 사실이 있다. 우리나라 대기업(수요기업)과 중소기업(공급기업) 사이에 신뢰가 부족하다는 현실이었다. 중소기업은 기껏 만들어놔도 가져다 써주질 않으니 도리가 없다고 호소하고, 대기업은 기초조차 안 되어 있는 중소기업을 멱살이라도 잡고 끌고 가야 하느냐고 하소연이다. 입장 차이가 고착화되다 보니 불신은 어느덧 거대한 비용이 되어버렸다. 고도성장 중에 덮어두었던 숙제가 눈덩이가 되어 돌아오고 있다.

사회적 자본이란 구성원들이 공동 목표를 위해 함께 일할 수 있는 능력이다. 사회학자들은 사회적 자본을 신뢰와 규범, 네트워크로 보고 그 중에서 신뢰가 사회적 자본의 중심적 요소라고 한다. 거래할 때 상대방을 신뢰할 수 있다면 계약을 맺고 이행하는 과정에서 서로를 믿지 못해 들여야 하는 거래비용이 줄어든다. 고로 수익성과 생산성이 높아지고 경제 성장으로 이어진다. 당연하지만 안타깝게도 신뢰는 하루아침에 생겨날 수 없고 돈으로 살 수도 없다.

연구개발도 마찬가지다. 재현되지 않는 연구 결과가 심심찮게 매스컴을 통해 떠들썩하게 발표된다. 기사대로라면 우리는 지금쯤 상당히 많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어야 한다. 연구를 해본 사람은 알지만, 성과에 대한 기대와 열망에 비해 현실적인 좌절과 끝없는 인내에 대한 두려움은 너무나 크다. 자신 외에는 아무도 모르는 노동을 하면서 직업윤리와 자신의 하는 일에 대한 자부심 없이 눈앞의 이익과 타협하지 않으리라 장담할 수 있을까.

인간은 노력하는 한 실수하기 마련이다. 노력하지 않으면 실수도 실패도 하지 않을 것이다. 일하지 않으면 감사 때 징계 받을 일도 없다. 출근부 도장 찍고 책임질 일만 재주껏 피하면 된다. 공정과 청렴의 가치야 두말하면 입 아프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직장에서 되도록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 상책이라는 이야기로 들릴 수도 있다. 아무리 국민에게 근본적이고 장기적으로 필요한 일이더라도 당장 국민이 체감하지 못하는 정책이면 추진하지 말라는 이야기로 들릴 수도 있다.

빌딩이 높을수록 지반이 약하면 위험한 법이다. 우리 사회를 떠받치고 있는 것들은 보이지 않는 것들이다.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은 적고 옥상옥 관리감독자들만 많은 가분수 구조는 아닌가. 정작 권한과 보상은 일하는 사람보다 관리 체계에 있는 사람에게 주어지고 있지는 않은가. 티가 나지 않는 일을 감당하고 있는 이들을 의식적으로 존중하고 보답하지 않는다면 우리 사회는 지속되기 어렵다. 과학도 그 중 하나다. 우리들이 아무 생각 없이 깔고 앉은 과학이 소리 소문 없이 질식해가고 있다.

민주주의는 시끄럽고 비효율적인 측면이 불가피하다. 인기를 얻어 권력을 위임받는 체제는 티 나지 않는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 그 자체로서 도전이다. 정책을 호떡 뒤집듯 하고 꽹과리 치는데 돈을 쓰는 꼴을 보면서도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해야 한다. 혼란과 불합리가 임계점을 넘으면 더 이상 민주주의를 지키기 쉽지 않다. 그렇기에 막대한 전쟁배상금과 경제난에 허덕이던 독일인들이 자진하여 히틀러에게 권력을 주지 않았던가.

민주주의와 경제적 풍요를 둘 다 누리고 싶다면 보이지 않는 것들, 티가 나지 않는 일을 존중하는 문화가 불문율처럼 자리 잡아야 한다. 모두들 티가 나는 것만을 좇아 자신의 몫을 차지할 때 티 나지 않는 일로 사회를 지탱하고 있는 이들을 지켜주어야 한다. 정부 당국과 언론을 비롯한 우리 사회의 책임 있는 주체들은 지금 해야 할 일을 하고 있는가? 공부가 부족하지는 않은가? 그들을 격려하든 질책하든 제대로 알고서 해야 할 텐데.

 

정택동 서울대 교수, 융기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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