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흐로 정치의 계절이다. 21대 총선을 90여일 앞두고 언론과 지역 정가가 들썩인다. 예비후보들이 일제히 선거운동에 나서면서 거리의 풍경도 달라졌다. 목 좋은 곳에 위치한 건물엔 대형현수막이 걸리고, 후보들은 연일 거리를 누빈다. 발 없는 말이 천리를 달리고, 저마다의 손가락 놀림이 천리마보다 빠른 속도로 사회관계망서비스를 뒤덮는다.

지난해 말 경기시민사회단체협의회 주최로 20대 국회 평가와 21대 총선 전망 토론회에 참석했다. 외부 전문가로 초청되었으나 내가 왜 초청되었는지는 나도 모르고, 주최 측도 모르고, 참석자들도 잘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아무려나 부름을 받았으니 밥값은 해야겠기에 몇 마디 거들었다. 주된 논의는 21대 총선 전망과 시민사회의 활동방향을 정하는 것이었다. 다양한 의견이 나왔는데 그중 기꺼이 동의를 표한 의견은 두 가지다. 하나는 거대정당의 전횡을 막기 위해 군소정당의 원내 진출을 적극 견인해야 한다는 것, 다른 하나는 이참에 다선의원들을 재평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의 관심은 온통 ‘다선 심판론’에 쏠렸다. 20대 국회의 3선 이상 다선의원은 무려 94명이나 된다. 특히 서울·경기 등 수도권에 다수가 포진해 있는데, 자의반타의반 불출마 의사를 밝힌 10여명을 제외하고 나면 대부분 21대 총선에 나설 전망이다.

참고로, 역대 최다선 기록은 9선으로 김영삼 전 대통령과 김종필 전 국무총리, 박준규 전 국회의장만이 그 반열에 올랐다. 현역 최다선은 8선의 서청원 의원이고, 7선의 이해찬 의원이 뒤를 잇는다. 좀 더 살펴보자. 역대 8선에 오른 이는 정일형 전 의원, 이만섭 전 국회의장, 김재광 전 국회부의장 등이 있다. 역대 7선의 관록을 보여준 이는 김재순, 신상우, 오세응, 유진산, 이기택, 이병희, 이재형, 이철승, 정해영, 조순형, 황낙주, 정몽준 전 의원 등이다.

현역으로 눈을 돌려 보자. 앞서 얘기했듯 8선과 7선은 각각 1명씩이고, 6선은 문희상 현 국회의장과 정세균 국무총리를 비롯해 5명이다. 5선과 4선의 중진은 특히 수도권에 집중돼 있다. 정병국, 원혜영, 이종걸, 원유철, 심재철이 5선이며, 홍문종, 안민석, 송영길, 김진표 등 4선 의원은 무려 33명이나 된다.

2015년에 출간된 ‘보좌의 정치학’(이진수 저/ 호두나무 간)에는 국회의원의 선수별 역할론이 나온다. 국회 본회의장인 로텐더홀에서 화장실이 어디냐고 묻는 사람이 초선이다. 그만큼 국회를 모른다는 얘기다. 재선은 각 상임위의 간사 역할을 할 정도의 역량을 갖춰야 제격이다. 3선은 상임위원장이나 각 당의 원내대표로 나설 만큼의 정치적 비중을 갖는다. 4선 이상은 당대표급이며 정치지도자의 위상을 갖는다.

현실의 의원들은 과연 자신의 선수에 맞는 정치적 역량과 정치력을 갖추고 있을까? 내 보기엔 ‘아니올씨다’다. ‘수도권 내리 4선’을 자부하는 모 의원은 정치지도자이기는커녕 연신 음모론 살포에 여념이 없다. 역시 수도권 5선의 모 의원은 ‘막말러’의 오명을 뒤집어쓰고 있다. 사회관계망서비스를 통해 정제되지 않은 말을 쏟아내면서다. 그 외 대부분의 다선들 역시 선수의 권위에 안주하기만 할 뿐 불성실한 의정활동과 의문스런 정치행보를 거듭하기가 다반사다.

의회정치의 역사가 깊은 영국과 미국의 의회용어 중에 ‘backbencher’라는 말이 있다. 초선의원을 가리키는 말이다. 초선의원은 의사당의 뒷자리에 않는다. 대신 의사당의 맨 앞줄, 즉 상대당과 논쟁을 벌여야 하는 자리엔 다선 의원이 앉는다. 초선의원은 다선의원들의 경험과 연륜에서 나오는 치열한 정책대결과 논쟁, 왕성한 의정활동을 보고 배우며 점차 앞자리로 나아간다.

우리 국회의 자리배치는 영국과 정반대다. 의장석과 연단을 기준으로 중진들은 뒷자리, 초선들은 앞자리에 앉는다. 앞자리에 앉은 초선들은 연단에 선 총리나 장관에게 야유를 보내고 고성을 지르며 시비를 건다. 동료의원의 발언 때도 마찬가지다. 뒷자리의 중진들은 그걸 독려하며 즐긴다. 국회의사당이 수시로 난장판으로 돌변하는 이유 중 하나다.

세상은 빛의 속도로 변하고 있다. 와중에 국회는 변화를 거부하며 구태를 답습할 뿐이다. 로텐더홀에 가서 화장실을 묻는 초선이 뭘 알겠는가. 저질국회의 책임은 대부분 다선들에게 있다. 지방자치단체장의 임기는 3선까지로 묶어둔 채 국회의원 자신들의 선수는 무한대로 늘릴 수 있도록 해놓은 것도 어이없다. 선거는 정치와 정치인에 대한 국민의 심판이다. 노회한 다선 의원을 심판하는 것이야말로 21대 총선의 주된 이슈여야 한다.

최준영 거리의 인문학자, 작가, 책고집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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