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압된 구속에서 벗어나기 위한 인간의 자유의지를 스크린에 걸고 싶을 때, 배경으로 동원되는 장소는 도망갈 빈틈이 없는 철옹성 같은 교도소다. 교도소가 검푸른 바다로 둘러쌓인 섬에 있다면 자유의지에 부응하는 더 좋은 배경을 담아낼 수 있다.

2017년 은막((銀幕)에 걸렸던 군함도의 배경이 떠오른다. 서로 다른 사연을품은 조선인들이 돈벌이가 된다는 말에 속아 배에 오른다. 하지만 조선인들을 태운 배가 도착한 곳은 ‘지옥섬’ 군함도다.

영문도 모른채 끌려온 강제징용 조선인들, 지하 1천m아래 막장에서 가스폭발의 위험속에서 노예처럼 일하고, 허기진 배를 형평없는 주먹밥으로 채우며 몽둥이로 맞고, 끊임없이 인권유린을 당했던… ‘지옥섬’ 군함도! 그 속에서 조선인들의 목숨건 탈출을 줄거리로 다뤘다.

경기도 서해안에는 많은 섬이 있다. 오이도, 대부도, 풍도, 국화도, 입파도 등 관광지로 유명세를 떨치고 있는 섬도 있지만, 낮설은 이름으로 잘 알려지지 않은, 한국 근현대사의 아픔으로 기억해야 할 섬도 있다.

안산시 대부도 끝자락에 위치한 ‘선감도’다. 일제강점기 1923년 감화령에 따라, 8세에서 18세사이의 불량스러운 행위를 하거나, 우려가 있는 소년을 감화시킨다는 미명하에 영흥학교와 목포학원이 설립된다. 뒤이어 1942년 감화령을 보다 강화시킨 조선소년령을 내세워 안산 선감도에 선감학원이라는 감화원을 추가로 설립한다.

선감학원의 목적은 부랑아들을 보호·육성하여 사회에 복귀시킨다는 것이었으나, 1942년 당시는 태평양 전쟁으로 인적,물적 자원을 무차별적으로 수탈해가는 시기였기에 감화보다는 전쟁에 필요한 인력을 확보하기 위한 훈육기관으로 운영된다.

그리고 선감학원은 바다로 둘러쌓인 섬에 위치했기에 인권유린사태가 무차별적으로 일어난 곳이었지만 1942년부터 해방 1945년까지 기록이 남아있지 않았다. 시간이 흘러 잊혀질뻔 했던 선감학원의 숨겨진 이야기가 당시 선감학원 부원장의 아들인 일본인 이하라씨에 의해 알려진다.

한국전쟁때 미군이 사용하기도 했지만, 해방이후 선감학원은 경기도가 관리했다. 1960년대부터 시작된 국가 차원의 부랑아 일제단속정책에 따라, 공무원과 경찰이 주어진 도급제에 따른 할당량을 채우거나, 경쟁적으로 거리를 돌아다니는 소년들을 부랑아로 몰아 무차별 연행, 선감학원으로 보냈다.

1967년 당시 9살로 초등학교 2학년이었던 피해생존자는 학교수업을 마치고 친구들과 시장을 둘러보던 중, 아저씨들이 맛있는 걸 사주겠다는 거짓말에 현혹되어 납치되듯 버스에 태워졌다. 속수무책으로 기약없이 선감도로 오게된 악몽의 서막이었다고 증언한다.

그리고 과거 군대에서나 있을법한 구타와 원산폭격, 한강철교 같은 기합, 손가락에 연필을 넣고 돌리는 고문 등 온갖 괴롭힘과 잔혹함은 쓰디쓴 일상으로 벌어졌다고 한다.

잠잘 때 불침번, 칼잠잘 때 덮치는 이불의 지린내, 모래로 치약을 삼고, 한겨울 얼음물 빨래, 이빨 손톱손질, 참혹한 현실에서 도망치다 들어오는 밀물에 휩쓸려 결국 주검이 되어 돌아왔던 동무 이야기 등은 어린나이에 감당하기 어려운 사실일게다.

배고픔과 구타를 모면하기 위해 또는 가족과 자유를 찾아서 섬을 탈출하려다 주검이 된 아이들, 그들은 가마니에 둘둘 말린채 야산에 이름없이 묻혔다. 기록이 없어 죽은 사람이 누군지, 몇 명인지 헤아릴 수 없다. 어렵사리 섬을 탈출한 이들은 밑바닥 생활을 전전하다 노인이 됐고, 가족을 그리움에 묻고 살거나, 피로에 지친 고단한 삶을 이어가고 있다.

해방 이후 선감학원 관리 주체는 경기도였다. 불량기 있는 아이들도 있었지만 부모 등 연고자가 있는 아이들도 많았던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인권유린, 강제납치…경기도가 선감학원에 대한 책임있는 조사와 합당한 대책을 마련해야 하는 이유다.

김현삼 경기도의회 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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