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탁칼럼] 진중권 신드롬
[김현탁칼럼] 진중권 신드롬
  • 김현탁
  • 기사입력 2020.02.13 21:38
  • 최종수정 2020.02.13 21:3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정의’ 라는 단어가 인간의 언어생활에서 결코 생소한 단어가 아니라는 걸 누구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의’라는 말이 마치 신조어처럼 새롭게 각광 받고 있다. 옳은 것과 그른 것의 개념조차 모호해지는 시대에 극으로 치닫는 내로 남불 현상의 심한 휴유증을 앓고 있다. 그와 더불어 언어의 사회화 현상은 원래 단어가 가지고 있던 사전적 해석을 벗어나 다른 뉘앙스로 풍겨지는 괴이한 풍조가 만연되고 있다.

그러한 현상은 요즈음 청소년들이 즐겨 쓰는 외국어와 한국어의 혼합, 단어와 단어의 머리말을 조합하여 생긴 신조어가 때론 신선하게 느껴지기도 하고 때로는 기성인들을 향한 비아냥처럼 들리기도 한다. 그것은 구시대에 대한 염증과 매너리즘에 빠진 세태에 대한 경고의 의미를 담고 있는 것 같다. 신세대와 구세대의 격차가 점점 좁혀져 가고 있는 듯하지만 아직은 그 간극이 분명히 먼 거리에 있는 것 같다. 그만큼 신세대의 언어 속에는 크레스바 같은 함정이 숨어있다. 그 저변에는 ‘정의’ ‘정직’ ‘정도’가 매몰되어 있는 기성세대를 향한 은유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요즈음 연일 진보 논객 진중권이 내뱉는 독침보다 무서운 일침이 이 세 개의 단어의 명료한 의미를 잘 말해주고 있다. 보통의 사람들이 학교에서, 가정에서 수없이 들어왔던 이 단어가 왜 돋보여 질까, 경제상황도 어렵고, 유행성 감기가 창궐하고, 정치권마저 서로 옳다고 우겨대는 난장판에서 유일하게 진중권은 누구편에도 서지 않고 마치 새로운 상표처럼 돌풍을 일으키며 시원한 사이다 맛을 제공해 주고 있다. 얄팍한 언어로 대중에게 인기를 얻었던작은 한마디가 아닌 무게의 추가 중심에 서있는 진중한 표현이다. 더러의 극렬 논객이 상스러운 말로 대항을 하기도 하지만 논리적으로 대항하지 못하고 있다. 고소한 땅콩처럼 오독오독 씹는 재미가 진중권의 말에 감칠맛을 더해준다. 진중권은 해박한 지식과 다양한 비유로 단순한 언술사가 아니라 정의로운 사자로 추앙받아야 하지 않을까.

따라서 진정한 논객은 정치권에 진입하려는 지능적 수단이 숨어 있어서도 안되고 목적이 없어야 한다. 제도권 아닌 재야에서, 초야에서 바른 소리를 해야 한다. 진중권 현상은 다수의 사람들이 말하지 못하는 현실의 정치와 사회 전반에 대한 통쾌한 한방을 날려주고 있다. 여, 야, 진보, 보수를 떠나 윤석열 총장처럼 곧은 길을 가고 있어도 ‘정치’한다고 옭아매는 비열한 비판이 무색해지도록 진중권은 그 중심에서 흔들리지 않는 ‘정의‘를 보여주고 있다. 그의 진언에 박수는 치지 못하더라도 자기 진영을 선동하고 이상한 법리와 궤변을 합리화 하려고 발버둥치는 모 장관에게 과연 ’정의‘는 살아있을까, 그 장관은 학교와 가정에서 또는 공부에서는 ‘수’를 맞아 ‘공부의 신’이 되었는지 모르지만 인간으로의 신은 ‘가’ 였지 않을까.

공정한 사회는 누구를 매도하거나 누구편에 서는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공자만 알고 예수가 알고 부처만이 아는 게 아니다. ‘정의’라는 단어는 보통의 사람들이 익히 알고 있는 단어이다. 진중권의 신드롬은 한 시대에 풍선처럼 휘날리다 사라지는 것이 아님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정의는 인류의 역사가 지속되는 날까지 영원히 소멸 되지 않아야 할 봉홧불이다.

추운 겨울이 지나가고 있다. 따뜻한 봄이 오면 작은 땅덩어리 대한민국이 더 이상 극한과 극서로 대치하지 말고 정의가 바로 설 때 그 날개가 빛바랜 낙엽처럼 앉을 곳을 찾지 못해 하늘가를 맴돌지 않아야 한다.

따라서 진중권을 존경한다. 하지만, 인간을 존경하는 것이 아니고 그 정신을 존경한다.

김현탁 한국현대문학연구소장 문학박사



볼만한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