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이전까지 조선에서 ‘的’(과녁 적)은 거의 ‘분명·밝음’의 뜻으로만 쓰였다. 조선왕조실록의 ‘적(的)’자 사용 보니 적지(的知, 정확히 앎) 918회, 적실(的實, 꼭 그러함) 610회, 지적(指的, 분명히 가리킴) 372회, 적확(的確, 틀림없음)은 152회 등장한다. 접미사 ‘~적’은 고종의 을사조약 기록에 ‘국제적’으로, 순종 때 ‘근본적’으로 한 차례씩 등장할 뿐이다. 이 두 개의 실록은 일본 궁내청이 간행하였다. 적(的)은 본래 ‘참, 분명, 밝다’의 뜻으로나 쓰였지, 관형격 접미사 ‘~적’으로는 쓰지 않던 말이다.

사정은 중국도 비슷해서, 12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청과 조선에서는 ‘적’을 한자 명사 뒤에 접미사로 붙여 ‘그 성질을 띠는, 그에 관계된, 그 상태가 된’의 뜻으로는 다루지 않았다. 어느 순간 그러한 쓰임이 일본에서 한자의 종주국 중국과 조선에 침투하였다. 어조사로서 ‘적’은 이전에 ‘지(之)’와 같이 ‘나의 일’(我的任)처럼 썼을 뿐인데, 일본이 1880년대 서양문물 도입하면서 만든 접미사 ’적‘이 갑자기 중국과 조선에 들불처럼 번졌다.

영어 형용사형 어미에 ‘-ic, -ical, -ish’가 있다. ‘ic, -ical’은 ‘~의, ~같은’처럼 형용사를 만든다. ‘-ish’는 명사에 붙어 ‘~같은’, 형용사에 붙어 ‘~의, ~한’을 뜻한다. alcoholic(알코올성), electronic(전자의)과 technical(기술의)이 그러하다. 또 economic(경제의)과 economical(효율의), historic(중요한)과 historical(역사상), classic(일류의)과 classical(고전의)처럼 1개의 명사에 2개의 형용사를 만들기도 한다. ‘-ish’는 childish(유치한)나 boyish(소년처럼) 형태로 나타난다.

형용사형 어미 ‘-ic’의 변형 ‘-tic’이 있다. 가끔 장난으로 ‘아동틱하다’(아동-tic) 같은 말 만들 듯, 개화기 일본에서도 그랬던 것 같다. ‘-tic’의 발음 ‘틱’을 일본인은 티키·치키로 소리한다. ‘적(的)’의 일본어 음독이 마침 테키(てき)라, 일본은 접미사 ‘-ic, -tic’이 지닌 의미 ‘~의, ~한, ~스런’ 표현하는 말로 한자 ‘的’(적→ 테키)을 차용하였다. 그래서 판타스틱(fantastic)은 환상的, 로맨틱(romantic)은 통째로 낭만적(浪漫的, 일본 발음 로만테키)으로 번역하자, 살짝 장난스럽던 조어가 번듯한 모양을 갖췄다.

그러나 ‘~적’을 이렇게 ‘무언가는 아니지만 그것에 준하는’ 의미로 사용하자, 的(적)의 본래 의미가 훼손되었다. ‘~스럽다, ~같은’ 표현은 조금 완곡하고 애매하다. ‘부정적’은 부정은 아니나 그 비슷하다는 말, ‘천재적’도 천재라는 건지 아닌지 알쏭달쏭하다. 그렇다고 이 말을 풀어 ‘부정스럽다, 천재스럽다’고 해도 될까 하면 그렇지도 못하다. ‘결사적 반대’는 정말 죽지는 않고, 다만 그 정도로 반대한다는 뜻이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뜨뜻미지근한 말장난처럼 읽힌다.

101년 전 기미독립선언서는 민족의 자존감 드높인 명문장이다. 그런데 여기에 일본제 번역어들 수두룩하고, 예의 ‘的’자도 무려 열일곱 차례나 등장한다. 게다가 그 중 여섯 번은 ‘민족’에 붙여 써서 더욱 씁쓸하다. 오늘날 일제 잔재 청산이란 말을 진중한 실천 없이 너무 쉽게 소비하는 건 아닐까. ‘~적’ 대신 ‘~스러운, ~다운’ 또는 ‘~(으)로, ~의, ~에서’로 고쳐 쓰거나, 아예 빼 버리려는 노력이 아쉽다. ‘적’자를 없애면 의미와 의지는 외려 더욱 지적(指的)하고 적지(的知)해진다. 안 쓰면 그만인 것이, 115년 전 조선 땅에 없던 표현이다.

유호명 경동대학교 대외협력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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