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출


시간과 함께 묶여있었다. 뭔가를 해야 한다는 것도 마음뿐, 고위험군으로 분류되는 나이다보니 자칫 민폐 끼칠 확률이 높았다. 그냥 몸 사리고 사회적 거리를 지키는 것이 그나마 애국이고 소극적인 봉사다 싶었다.

일주일에 두 장 마스크를 살 수 있는 날이었다. 지난주에 내 앞에 두 사람을 두고 번호표가 동이 났던지라 조금 서둘러 나섰다. 잠시 바람을 쐬러 나갔다가 마스크를 쓰지 않은 나를 피해가는 사람을 보고 민망했던 기억에 꼼짝없이 그 긴 줄에 붙들렸다. 사기도 어렵지만 써도 답답하고 불편한 마스크. 그것 두 장에 배가 부른 기분을 뭐라고 할까. 포만감에 느긋이 걷는데 참 날씨 한 번 좋았다. 함께 묶인 줄 알았던 시간은 저 혼자 2월을 건너더니 내일이 춘분이었다. 꽃샘바람은 불었던가? 그냥 들어가면 날씨에게 너무 미안할 것 같았다.

달맞이공원은 카페촌 골목을 지나야 한다. 손글씨로 만든 카페 간판들이 도란거리고 은근히 맛집임을 내세우는 식당, 거기에 틈새를 노리고 애견용품을 앙증맞게 진열한 센스 있는 가게까지 산책길에 기웃거리기 좋은 곳. 창가엔 낮은 음악과 커피 향, 잔잔한 웃음이 머무는 조용한 가운데 분주한 활력이 넘치는 골목이다.

식당가 모퉁이를 돌아 통유리 창이 훤한 카페들을 지나면 공원이다. 두어 집을 지났지만 창가에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식당가를 지나면서도 사람을 보지 못했다. 좀 늦긴 했지만 아직 점심시간인데…. 조금 더 가다보니 길가로 난 카페 유리문 모서리에 낙엽이 수북이 쌓여있었다. 저절로 발이 멈췄다. 카페 안은 정적만이 탁자 위에 소복했다. 쌓여있는 나뭇잎에선 어둠이 스멀거리는 것 같았다. 한걸음 가까이 가보니 낙엽더미 위에 누가 던져놓았는지 스티커 한 장이 얹혀있었다. 명함만한 종이를 가득채운 글자 네 개.

"바 로 대 출"

다리에 힘이 쏙 빠져나갔다. 그 글자 아래 고통으로 일그러진 누군가의 얼굴이 보이는 것 같았다. 문득 이렇게 맑고 화창한 날씨도 어쩌면 대출해온 것이나 아닐까 싶었다. 공원 입구에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진달래 꽃망울에서 붉은 피 한 방울이 똑 떨어질 것 같았다.



▶김이경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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