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충칭을 찾은 것 지난해 3월 28일이었다. 먼 이국땅에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년을 기해 충칭시 유중구 추용로 37호. 원래 있던 그 자리에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건물이 복원됐기 때문이다. 3월 29일 복원 기념식에 참석해 대한민국 독립투쟁의 역사를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복원 기념식이 끝난 후 회색 벽돌로 단단하게 쌓아 올린 4층 건물 앞에서 기념 촬영을 하고 내부 전시물을 돌아봤다. 1층은 당시 총사령부 역사 소개와 관련 전시물이 진열되어 있었으며, 2층은 당시 사무실 모습 그대로 재현되어 있었다.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건물을 관람하면서 느낀 점은 일제 강점기 시대 조국의 독립을 위한 무장투쟁의 심장 역할을 담당해 온 광복군 총사령 지청천 장군을 비롯한 광복군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그리고 얼마나 고단한 삶을 살았을까 하는 생각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임시정부의 국군이자 대일항전의 핵심이던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복원을 계기로 한국광복군과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역사적 의미를 되짚어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1910년 한반도는 일제에 의해 강제로 병합되었다. 빼앗긴 주권을 되찾기 위해 1919년 3월 1일부터 한반도에서는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거리로 뛰쳐나와 독립만세를 불렀다. 당시 인구의 10분의 1이 넘는 2백만 민중이 만세에 동참했다. 만세운동은 만주, 연해주, 중국, 러시아, 일본, 미국 등으로 번졌다. 그 해 4월 11일 우리 선각자들은 중국 상하이에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수립했다. 임시정부는 출범할 때부터 군무부를 설치하고 독립전쟁 방침을 확고히 했다. 일제가 윤봉길 의사의 홍커우 의거 이후 임시정부에 대한 탄압을 강화하게 되자 임시정부는 1932년 상하이를 떠나 항저우, 전장, 창사, 광저우 등을 거쳐 1940년 충칭으로 자리를 옮겼다. 여기에서 광복군을 창설했다. 광복군 창군은 독립전쟁의 최종 귀결점이었다. 광복군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최초 정규군으로 항일 독립운동사에서 갖는 역사적 의의는 어떨까.

첫째, 광복군은 자주적인 군대였다. 처음에는 중국 국민당 정부가 재정 원조의 대가로 광복군을 중국군사위원회에 예속된 중국군대로 간주했다. 이에 임시정부와 광복군은 중국군사위원회와 오랜 외교전을 펼쳐 결국에는 1945년 4월 4일 양국 사이에 새로운 군사협정인 원조한국광복군판법이 체결돼 광복군의 통수권은 임시정부에 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둘째, 광복군은 연합군의 일원이었다. 중국과 군사협정을 맺고 있었고, 인도·미얀마전선에서는 영국군과 합동작전을 펼쳤다. 1945년 미국전략사무국인 OSS와 함께 한반도 침투를 위한 독수리작전을 펼치기도 했다.

셋째, 광복군은 대일항전의 중심이었다. 광복군이 있었기에 1941년 12월 임시정부는 일본에 선전포고 할 수 있었다. 미국, 영국, 중국의 3개국 연합국 측이 1943년 11월 27일 이집트 카이로선언을 통해 한국을 독립시킬 것을 결의하게 된 배경에는 임시정부와 광복군의 대일항전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는 4월 11일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된 지 101주년을 맞는다. 임시정부는 오늘의 대한민국의 뿌리다. 우리는 독립의 역사를 기억하고 후대에 전하며, 희생하신 애국선열들을 예우해야 한다. 수많은 희생과 헌신으로 이룩한 오늘의 대한민국. 우리의 뿌리이자 우리의 정신인 대한민국임시정부를 기억하고 그 법통을 계승해 나가는 자랑스러운 대한국민이 되자.

정병천 경기남부보훈지청장

저작권자 © 중부일보 - 경기·인천의 든든한 친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