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현장에서 미래를 그리다] 남한강변의 투사 이수흥과 조성환 "동포들은 싸워 꼭 독립성취하시오"
[항일현장에서 미래를 그리다] 남한강변의 투사 이수흥과 조성환 "동포들은 싸워 꼭 독립성취하시오"
  • 이시은
  • 기사입력 2020.05.21 19:37
  • 최종수정 2020.05.21 1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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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에 보존돼 있는 조성환의 생가

지금으로부터 95년 전인 1926년 5월 중순 21살의 한 청년이 모젤 권총 2정과 실탄 980발을 감춘 채 중국 서간도 환인에서 압록강을 몰래 건넜다. 청년은 의주가도를 따라 걸어서 평양에 도달했고, 이어 황해도 평산의 친일부호집에 들어가 독립자금을 요구하였다. 하지만 요구를 거부당하자 허공에 권총 1발을 발사하고 집을 나왔다. 다시 걸어서 서울에 도착한 청년은 6·10독립만세운동으로 삼엄해진 동소문 파출소에 들어가 일본 순경에게 권총 6발을 발사해 쓰러뜨렸다. 도심 한복판에서 일어난 이 과감한 총격사건으로 인해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큰 혼란에 빠졌다. 이 청년은 누구일까.

주인공은 경기도 이천 창전리의 유학자 이일영의 외아들인 이수흥(李壽興, 1905~1929)이다. 면암 최익현의 제자로 의병활동에 참여했던 부친의 영향으로 이천공립보통학교를 다니다가 일본 교사의 식민교육에 반발해 자퇴한 후 승려 생활을 한 이수흥은 이후 일본인이 경영하는 통신사에서 일하다가 심한 민족차별을 겪었다. 이에 독립운동으로 나라를 되찾아야겠다고 결심한 그는 19세 어린 나이에 홀로 만주로 망명하였다. 1923년 만주 길림성의 독립운동 단체인 의군부의 총재 채상덕을 찾아가 제자가 된 이수흥은 김좌진 장군이 세운 신명학교에 들어가 수업을 마친 후 주만참의부 제2중대의 특무정사로 임명받아 활동했다. 허나 1925년 그가 속한 제2중대가 위치한 고마령이란 깊은 산속에서 군사회의를 하던 참의부 지도부가 일본군의 습격으로 인해 29명이 목숨을 잃는 참변을 겪게 된다. 현장에서 총상을 입고 겨우 목숨을 건진 이수흥은 스승 채상덕의 유언에 따라 국내로 잠입해 의열투쟁을 벌이기로 결심한 것이다.

고마령 참변의 원수를 갚으려 조선총독부 총독을 응징하려는 계획 아래 이수흥은 삼엄한 서울을 탈출해 고향 친구인 유남수와 그의 형 유택수를 찾아 이천군 읍내로 잠입하였다. 이들은 거사 준비를 위해 9월경 안성군의 부호인 박승륙을 찾아가 군자금을 요청하였지만, 그의 아들이 오히려 일행을 체포하려들자 권총을 발사해 즉사하게 하였다. 일행이 방안에 숨겨둔 돈을 가져가려하자, 이수흥은 독립군이 강도와 같을 순 없다며 거절하였다. 이후 이수흥은 10월 20일 이천군 백사면 현방리에 있는 식산회사를 습격하기 위해 먼저 경찰관주재소를 공격하기로 하였다. 그는 주재소로 쳐들어가 순사 2명에게 총격을 가했고, 이어 농민들의 지세를 수탈 중이던 백사면사무소를 습격한 후 도주하였다, 일제는 이수흥을 붙잡기위해 6개월 동안 경찰 3천여 명을 동원했지만 종적을 찾지 못하자, 현상금으로 거금 1백만원을 걸었다. 이에 현상금을 탐낸 고향 6촌형의 밀고로 인해 체포되고 말았다.

일제는 1928년 6월 이수흥과 유택수에게 사형을 언도하였다. 참의부 명령을 받은 것이냐는 판사의 물음에 이수흥은 "내가 단독으로 한 일이며, 안중근이 이등을 죽인 것을 본받고 싶었다."고 당당히 답변했다. 형장에서 남긴 그의 마지막 말은 "내가 기필코 대한독립을 성취하려 했더니 원수들의 손에 잡혀 일의 열매를 못 맺고 감이 원통한 즉, 동포 여러분들은 끝까지 싸워 독립을 성취하여 주시기 바란다."이며, 대한독립만세를 세 번 외치고 수형대에 올랐다고 한다. 무장투쟁의 투지로 일제와 싸우다 25세 나이로 순국한 그에게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고, 이천시민들은 그가 붙잡힌 창전동 자리에 ‘이수흥공원’을 조성해 그의 동상과 옥중서한비를 세웠다.

남한강변에서 제2의 안중근을 꿈꾸며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한 이수흥의 당부는 가까운 이웃 여주군 대신면 태생으로 대한민국 군무부장을 역임한 조성환(曺成煥, 1875~1948)에 의해 꽃을 피웠다. 순종때 이조판서를 지낸 조부에 의해 건립된 대신면 보통리 고가에서 태어난 조성환은 1900년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했으나 군부의 부패함을 숙정하려다 발각되어 사형을 선고받은 강골 무인이다. 그 뒤 무기징역으로 감형된 뒤 3년 만에 칙령으로 특사되어 참위로 임관되었지만 사직하였다.

1906년 안창호 등과 함께 신민회를 조직한 후 이듬해 연해주로 망명해 이상설을 지원하였다. 그뒤 중국 북경으로 건너가 한중공동전선을 형성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다가 1919년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참여해 군무부차장에 임명되었다. 그해 8월 만주로 가 서일·김좌진 등과 북로군정서를 창설해 봉오동·청산리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데 앞장섰다.

이수흥 공원에 있는 이수흥의 동상
이수흥 공원에 있는 이수흥의 동상

1931년 임시의정원 경기도위원으로 당선된데 이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군무총장으로 봉직하였다. 1937년 일제가 중국대륙을 본격 침공하자, 임시정부 국무위원으로서 망명길에 나섰다. 193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사특파단장의 자격으로 중국 서안에 파견되어 중국정부와 협의해 한국광복군을 창설하는데 기여했다. 군무부장으로서 조성환은 1942년 조선의용대를 한국광복군에 합류시켜 제1지대로 만든 일과 한국광복군의 발목을 묶어놓은 ‘광복군 9개 행동준승’을 푸는 일에 전념했다. 중국국민당 군사위원회가 자신들의 땅에 무장한 한국군대의 독자활동을 막기 위해 군사이동과 작전을 일일이 통제하려 했는데, 약 3년만인 1944년 9월 광복군의 통솔권한을 넘겨주었다. 1943년 태평양전쟁의 막바지에 접어들어 연합국의 대표들이 한국을 공동으로 관리하자는 ‘국제공동관리’ 방안이 발표되자, 조성환 등은 충칭에서 자유한인대회를 열고 성명서를 발표해 전후 한국의 절대독립을 주창하였다. 이러한 노력으로 미국·중국·영국 수뇌부가 이집트 카이로에 회동해 만든 선언문에 ‘전후 한국을 독립시킨다’는 내용을 담을 수 있었다.

조성환은 미국 OSS부대와의 연합작전을 펼쳐 국내로의 진공작전을 준비하고 동북의 조선의용군과 연합하는 구상을 실천에 옮기다 해방을 맞았다. 1945년 12월 임시정부 요인과 같이 환국한 그는 한국장교단장·대한독립촉성회위원장·성균관부총재 등을 역임하다가 1948년 10월 눈을 감았다. 조성환의 여주 생가에서 멀지 않은 금사면 주록리는 중국 상해와 중경까지 동고동락한 동지 엄항섭(嚴恒燮, 1898~1962)의 생가도 있다. 다행이 고향 여주경찰서 후배들이 2019년 10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의경대 간사로 활동한 고인을 기려 생가터에 기념물을 설치하였다. 이천과 안성의 이수흥 의거현장과 조성환·엄항섭의 생가를 연결하는 ‘남한강변 의열루트’도 개발해 봄직하다. 아직은 고적해 보이지만, 시원한 남한강변 강바람이 외세가 아닌 스스로의 피땀으로 나라를 되찾고자 했던 그들의 의기를 타고 우리에게 손짓하는 듯하다.

글·사진=김명섭 단국대 동양학연구원 연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