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릉보다 오래된 천년고찰

봉선사는 이웃한 광릉과 국립수목원의 명성에 가려 의외로 많은 이들이 모르고 지나치는 절이다. 사찰 앞을 지나는 98번 국지도가 아름답기로 손꼽히는 드라이브 코스인 까닭도 있다. 사실 광릉숲 여행 코스는 광릉과 국립수목원, 그리고 봉선사로 완성된다. 광릉숲을 한 그루 나무로 비유하다면 세 장소는 한 몸통에서 뻗어나간 나무의 가지들과 같다. 이 나무는 조선 제7대 왕, 세조에게서 기원한다. 세조는 죽어서 자신이 사냥터로 즐겨 찾던 숲에 묻혔고, 숲자락의 절 봉선사는 이미 고려 때부터 있어왔지만 능을 수호하는 사찰로서 새롭게 거듭났다. 절과 숲 일대가 신성한 영역으로 500년간 보존되었고 이후 그 일부는 국립수목원이 되었다. 그러니 광릉과 국립수목원, 봉선사는 물리적으로나 역사적으로나 한 몸으로 봐도 무방하다. 때문에 광릉숲까지 와서 봉선사에 들르지 않음은 큰 나무의 일부만 보고 가는 것이나 매한가지다. 역사적 의미를 차치하더라도 일부러 들를만한 가치가 충분한 절이다.
 

한글 편액, 숲에 동화된 듯 한 가람배치…. 활짝 열린 사찰

봉선사는 광릉숲 일대에서 가장 ‘열린 장소’다. 국립수목원은 보전 차원에서 예약제로 방문객을 맞고 광릉은 왕릉이기에 갖는 구조적인 폐쇄성과 엄숙함이 깃들어 있다. 봉선사는 다르다. 사찰의 일주문이 98번 국지도에서 곧바로 보인다. 산사임에도 진입로가 없다. 일주문 편액에는 한자가 아니라 한글로, 세로쓰기로 보기 좋게 ‘운악산 봉선사’라 쓰여 있다. 편액 앞에서 까막눈이 되어본 적 없는 이가 드물 터. 여섯 일곱살 꼬마도 또박또박 산사 이름을 읽어내니 첫인상부터 참 다정한 사찰이다.

일주문을 넘어서면 왼편으로 커다란 연못이 있다. 연못 위로 데크길을 설치해 연못 산책을 할 수 있다. 연못에서 경내 건물은 잘 보이지 않는다. 천천히, 여기저기 한눈 좀 팔고와도 된다는 부처님의 배려 같다. 6월에서 9월까지, 연못은 커다란 연잎으로 무성하고 연꽃 향기가 짙다. 연못을 중심으로 매년 여름 봉선사 연꽃축제가 열린다. 연못은 진입로를 따라 조금만 더 올라가면 하나가 더 있다. 두 번째 연못에서야 비로소 경내가 눈에 들어오는데 5월이면 이미 신록이 울창해 지붕들만 빼꼼히 보인다. 가람배치가 숲과 수평을 이룬다. 사찰 건물들이 주변의 나무들과 키를 맞추고 숲의 일원으로 존재함을 느낄 수 있다.

연못 쪽으로 길게 빠진 야외테라스가 눈에 띈다. 카페 봉향당이다. 절을 찾은 손님들의 사랑방 역할을 하는 곳이다. 테라스에 앉아 아메리카노 한 잔에 연꿀빵 한 개 곁들이며 사방의 수목, 눈앞의 연못을 바라보노라면 내 안에 번뇌가 다 사라지는 듯하다. 봉향당만 놓고 보면 봉선사는 ‘운치 있는 찻집’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사찰의 무게를 질책하는 의미가 아니다. 누구나 드나들 수 있는 쉼터가 입구에 있어 이방인도 가볍게 절 문턱을 넘으니 좋다는 뜻이다. 봉향당 지붕을 드리운 커다란 느티나무는 세조가 죽은 후 정희왕후 윤씨가 봉선사를 중창할 적에 심었다고 전해진다. 느티나무를 비롯해 절을 둘러싼 많은 나무들이 500년의 수령을 자랑한다. 봉선사가 제 아무리 세상과 눈높이를 맞춘 열린 절이라한들, 노수 아래 한낱 중생은 말없이 겸손해질 따름이다.

느티나무 아래로 곧장 올라가지 않고 우측으로 꺾어 들어가면 보이는 2층 누각이 범종루다. 1층에 걸린 범종은 봉선사의 상징이자 보물 제397호로 세조의 명복을 빌기 위해 조선 예종1년(1469년)에 왕실에서 주조했다. 이 종은 억불숭유 시대에, 그것도 왕실에서 공들여 만들었기에 희귀하고도 특별하다. 세조를 기리기 위한 것이지만 이는 생전에 불심이 깊었던 세조의 뜻이라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범종루와 이웃한 청풍루를 지나면 비로소 삼층석탑을 앞에 둔 큰법당이 등장한다. 큰법당은 우리가 아는 대웅전을 뜻한다. 봉선사의 대웅전은 어쩌다 큰법당이 되었을까. 일주문과 마찬가지로 큰법당도 한글 편액을 걸었다. 예리한 데 없이 동글동글한 서체가 오랜 벗의 손글씨처럼 친근하다. 1970년 중건한 전각에 대웅전 대신 큰법당이라 이름을 붙인 이는 당시 주지였던 운허스님이다. 독립운동가 출신인 운허스님은 경전을 이해하기 쉬운 한글로 번역하고 국내 최초의 불교사전을 번역하는 등 불교 대중화에 앞장선 인물이다. 같은 맥락에서 봉선사 대웅전을 큰법당으로 부르고 편액과 주련 또한 한글로 걸었다. 광릉에 묻힌 세조가 조선 최초의 한글대장경 ‘월인석보’를 간행한 ‘한글 사랑꾼’이었음을 상기하면 이 또한 묘한 인연이다.

일주문의 한글 편액은 그 서체를 운허스님의 유고(遺稿)에서 집자했다. 일주문 편액 서체와는 확연히 다른 큰법당 편액 서체는 서예가 운봉 금인석의 작품이다. 큰법당과 바로 뒷건물인 조사전의 한글 주련은 석주스님이 썼다. 운허스님과 함께 경전의 한글화에 힘썼던 석주스님의 서체는 서울 칠보사의 ‘큰법당’ 편액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유네스코 생물권 보전지역에 걸맞은 자연친화적 템플스테이

봉선사는 10~15분이면 충분히 둘러볼만한 규모다. 불자가 아니고서야 한글 편액과 범종, 연못을 돌아보고 나면 경내 산책은 일단락된다. 좀더 특별한 산책을 하고 싶다면 봉선사 템플스테이를 추천한다. 어떤 곳이든 오래 머물수록 새롭게 보이는 매력이 있기 마련이다. 봉선사에서의 하룻밤은 사찰 그 자체에서 자연으로 시야가 확장되는 경험이다.

광릉숲 자락의 봉선사는 유네스코 생물권 보전지역에 속한다. 왕릉을 지키는 능침사찰인 동시에 그 자신도 범세계적 보호를 받는 땅 위에 존재한다. 예나지나 함부로 다닐 수 없는 지역이어서 개방적인 분위기의 봉선사라 해도 주변은 온통 불가침의 영역이다. 사실상 봉선사를 감싼 광릉숲 전부가 보호 지역이라 봉선사를 통해 숲으로 들어갈 수는 없다. 다만 옛적부터 봉선사 스님들이 수행을 위해 오갔던 숲길만은 스님의 인솔 하에 산책할 수 있다. 이른바 ‘비밀의 숲 포행’으로 봉선사 템플스테이의 대표적인 프로그램이다.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아 풀이 무성한 숲길을 걸으며 맑고 깊은 숨을 마시고 스님의 좋은 말씀을 듣는다. 오롯이 자연을 느끼며 걷다보면 근심이 사라지고 마음은 차분해진다. 정좌하지 않고도 참선하는 기분이다.

열린 사찰 봉선사의 또다른 키워드는 ‘사찰음식’이다. 절밥이야 어느 절을 가든 먹을 수 있지만 직접 만들 수 있는 기회는 흔치 않다. 채운관은 사찰음식을 배울 수 있는 전문 조리장(調理場)이다. 웬만한 쿠킹 스튜디오 못지않은 규모와 시설을 자랑한다. 사찰음식 전문가 유화스님이 재료 본연의 맛과 향을 살린 다양한 사찰음식 만들기를 선보인다. 단지 배를 채우기 위한 음식이 아니라 수행의 연장선으로써 음식을 직접 만드는 경험은 특별하다. 교육과정은 1년으로 매주 1회 2시간씩 진행한다. 일회성 수업은 따로 없지만 봉선사 템플스테이에 참여하면 채운관에서 연잎밥을 직접 만들어 먹는 체험을 할 수 있다.

광릉불고기 (2)
 
광릉불고기 (1)
 

여긴 어떠세요

봉선사를 포함해 광릉, 국립수목원으로 이어지는 이른바 ‘광릉숲 클러스터’는 반나절 나들이 코스로 적당하다. 노거수가 울창해 근사한 드라이브 코스, 98번 국지도가 세 곳을 연결한다. 도로 변에 걷기 좋은 보행로가 갖춰져 있어 뚜벅이 여행자들도 어렵지 않게 세 곳 모두를 둘러볼 수 있다. 수목이 우거진 지역인 만큼 초록으로 물든 시기가 아름다운데 산책 코스가 많은 만큼 7~8월 혹서기는 피하는 편이 좋다. 4~6월이 산책하기 좋고 연둣빛부터 진녹빛까지 초록숲의 채도가 다채로워서 눈이 즐겁다.

광릉의 진입로, 정확히는 세조와 정희왕후의 능으로 가는 길은 길 양쪽의 나무들이 그늘을 만들어 한여름에도 그리 덥지 않다. 두 능은 가운데 정자를 두고 V자로 위치해 독특한 배치를 보여준다. 국립수목원은 당일 마감시간 1시간 전까지 홈페이지를 통해 예약한 후 입장할 수 있다. 다양한 테마의 정원과 산책로, 크고 작은 연못이 있으며 산림박물관이 운영되고 있다. 규모가 커서 휴식과 관람을 여유 있게 하려면 서너 시간 정도는 잡고 가는 편이 좋다.

주변에 식사를 할 만한 곳으로는 남양주시 진접읍에 위치한 ‘광릉불고기’와 ‘광릉돌솥밥’이 있다. 십 수년째 ‘수목원 맛집’ 타이틀을 유지하고 있는 식당들이다. 두 곳 모두 불고기를 메인 요리로, 정갈하게 담아낸 각종 반찬들을 내어준다. 무난하게 차린 한정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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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사진 여행작가 유승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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