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성으로 압송된 이규채
경성으로 압송된 이규채

경기도 북부 지역이면서 한반도의 가운데를 차지하는 포천과 가평은 산수가 빼어나서 생태 환경이 우수하다. 이 곳에도 의병 활동과 3·1운동과 관련된 항일 유적지가 많다. 포천의 경우 의병 활동과 관련한 유적지로 왕방산 의병전투지와 상송우시장 의병전투지가 있다. 3·1운동 만세시위지로는 송우리 헌병분견소 3·1운동 만세시위지, 무봉리 3·1운동 만세시위지, 옛 신북면사무소터 3·1운동 만세시위지 등이 있다.

이 지역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로는 누가 있을까? 포천의 이규채는 주목할 가치가 있는 사람이다. 이규채 선생의 삶과 독립운동은 ‘자술 연보’를 통해 비교적 상세하게 더듬어볼 수 있다. 총 32장, 내용 54쪽을 기록한 용지는 일반 종이가 아니라 1940년대 포천군 송우리에 소재한 ‘김수명 상점’의 계산서 용지다. 일반 종이를 구하기 어려워 상점의 계산지 묶음을 얻어서 기록한 것이다. 이규채는 이 계산서 묶음에 자신의 기록을 연대순으로 써 내려갔다.

이규채의 자술연보
이규채의 자술연보

"2천만 민중의 마음을 귀순시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다. 2천만 민중이 한 사람도 남지 않고 죽임을 당하기 전까지는 독립운동은 종식되지 않을 것이다." 독립운동가 이규채(1890∼1947)는 1934년 12월 8일 중국 상하이 일본총영사관 사법경찰관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는 그해 9월 25일 상하이에서 한약을 사러 갔다가 한약방 앞에서 경관에게 붙잡혔다.

이규채(李圭彩)는 자신이 직접 기록한 연보에 따르면 1890년 경기도 포천군 가산면 방축리에서 태어났다. 포천 청성학교 교사로 2년간 봉직하였고, 1921년에는 경성 창신서화연구회를 창설하여 서예의 대중화에 기여하였으며 학생층을 상대로 비밀 운동을 전개하던 중 일본 경찰에 발각되자 독립운동을 자유로이 할 수 있는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였다. 1924년 12월 대한민국 임시 정부 임시 의정원의 충청도 의원으로 선출되어 활동하다가 이듬해인 1925년에 사임하였다. 그 이유는 임시정부의 체제로는 독립운동을 이끌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후 서성구·후경소·이회영·서경석·김좌진·이장녕·홍만호·황학수·여시당·박일만·윤상갑·이진구 등 독립운동가 및 현지인들과 교류하면서 서로 일을 도모하거나 혹은 도움을 받으면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던 중에 1930년 7월 한국독립당 창당에 참여하여 한국독립당의 정치부위원 겸 군사부참모장에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한국독립당은 1930년 7월에 한족자치연합회를 모체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하기 위한 목적으로 홍진·신숙·남대관·이청천 등이 창설한 독립운동 단체였다. 이와 더불어 각부에 소속되었던 독립군 중에서 정예 대원을 뽑아 한국 독립당군을 편성하고, 당에는 6개의 위원회를 두는 한편 중앙 당부, 지당부, 구당부를 설치하고 만주 전역 독립 단체를 총망라하여 진영을 강화하였다.

1932년 3월 이규채는 조지한·이종선 등과 함께 중국 아성현 영발둔에 있는 중국군 사령관 고봉림과 참모장 조린을 찾아 공동 항일전 합작을 협의했으며, 이때 한국독립당의 총무위원장으로 선출되었으며 본부를 만주에서 베이징으로 옮기는 데 큰 역할을 담당하였다.

"새벽녘이 되어서야 왼쪽 손에 총을 맞아 부상을 당하였다는 것을 알았다. 곁에 있던 사람이 먼저 보고서는 깜짝 놀랐다." 1932년 9월 하얼빈 남쪽의 쌍성보에서 한·중 연합군과 일본군이 교전을 벌였다. 쌍성보는 만주의 경제적 요충지로, 1년 전 만주사변을 일으킨 일제가 호시탐탐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 이규채 선생은 당시 만주의 한국독립당 총무위원장이자 한국독립군 참모장으로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전투에서 왼손에 총상을 입었지만, 전투가 끝난 뒤에야 비로소 알았던 것이다. 1933년에는 중국 지린 육군 제3군 상교참모로 활약하였다. 1934년 중국 난징에 본부를 두고 있던 한국혁명당의 신익희·윤기섭 등과 손을 잡고 신한독립당을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1934년 일본 경찰에 체포된 이규채는 그후 상해를 거쳐 청도로 이송되었고 이곳에서 독방에 수감되었다. 청도에서 다시 인천으로 압송되었고, 서울 서대문형무소를 거쳐 경성형무소에 수감되었다. 1935년 2월 26일 공판에서 "나는 총독정치의 부당한 압박에 자극받아 조선의 독립운동에 몸을 던졌고, 독립이 되지 않은 동안은 다시 조선 땅을 밟지 않겠다는 결심으로 부모와 처자를 버리고 해외로 나갔다"고 말했다. 법원에서도 소신을 꺾지 않은 이규채는 결국 치안유지법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징역 10년을 선고받았고, 1940년 가석방됐다.

이규채 선생은 해방 후 잠시 언론계에 관여하였고 정계에 투신하여 미소공동위원회대책 국민연맹대표, 대한독립촉성국민회 회장 등을 역임하기도 했다. 1948년 2월 사망하였다. 포천시 가산면 방축리에는 이규채 선생의 생가가 있으며 근처에 이규채 선생의 행적비가 1982년에 건립되었다.

포천에 있는 이규채 행적비
포천에 있는 이규채 행적비

포천과 이웃한 가평군의 경우 의병 활동과 관련된 유적지로는 보납산 의병전투지와 옛 가평군청 의병전투지가 있다. 또 3·1운동 만세시위지로는 북면사무소 터 3·1운동 만세시위지와 가평공립보통학교 3·1운동 만세시위지 등이 있다.

가평천과 북한강이 만나는 보납산의 자라목 부근에서는 1896년 2월 22일 정부의 토벌대와 이충응과 신재가 등이 지휘하는 가평 일대의 연합의병이 토벌대와 전투를 벌였으나 화력이 우세한 관군에게 패하여 가평 북면으로 일시 퇴각하였고, 신재가는 일본군에 체포되어 참형당하였다. 6월 15일 전열을 재정비한 이충응이 이끄는 의병부대는 옛 가평군청을 기습하였으나 토벌군의 숫자와 신식무기의 화력에 밀려 다시 물러나고 말았다.

3·1 만세 운동은 1919년 3월 15일과 16일 양일간에 걸쳐 전개되었는데 만세시위를 주도한 30여 명은 농민, 학생, 종교인, 상인, 구장 등 다양한 직업을 갖춘 사람들이다. 이들은 가평군청, 가평공립보통학교, 군내면 사무소 등지를 돌며 시위행진을 벌였는데, 참여 숫자나 분위기에서 가평 만세 운동의 정점을 이루었다. 만세 시위 이후 일제 경찰에 체포된 사람은 70여 명이나 되었고, 이 중에서 28명은 실형이 선고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으며 나머지 사람들은 태형 30대를 맞고 석방되었다.

가평 현등사 입구의 삼충단
가평 현등사 입구의 삼충단

그리고 현등사 입구에 가면 삼충단(三忠壇)이 있다. 삼충단은 구한말 일제의 무단 침략에 항거하다 자결한 조병세·최익현·민영환 등 세 충신의 고귀한 정신을 추모하기 위하여 일제감점기이던 1910년 가평의 유림들이 설립한 제단으로 매년 11월 25일 정오에 추모제를 거행하고 있다.

가평에는 최신 시설을 자랑하는 대규모 가평종합운동장이 있다. 5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종합운동장과 가평야구장, 가평체육관, 한석봉체육관, 축구공원, 국궁장, 테니스장, 농구장, 풋살장 등으로 구성돼있으며, 부지 내에는 체육시설 이외에 가평문화원, 가평예술회관, 가평여성회관 등이 있다. 여기에도 항일 유적지가 있다. 가평의병항일운동기념비가 그것이다. 가평학도의용대참전기념비를 지나 가평종합운동장 뒤쪽을 돌아가면 숲 속에 있다. 이러한 유적들은 가급적 눈에 뜨기 쉽고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곳에 배치하는 것이 합당하다. 가평의 자랑스런 의병항일운동기념비를 이렇게 꼭꼭 숨겨 놓은 이유를 모르겠다.

글·사진=김기영 위례역사문화연구소 연구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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