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부와 봉사는 광의의 맥락에서 보면 동일한 행위라고 볼 수 있다. 그 행위는 당연히 타인을 위한, 희생정신 또는 재화와 물질의 나눔이다.

인류 공동체는 원시시대에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서로 돕고 사는 공존의 미덕을 행해왔다.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의식은 사회 전반에 널리 토착화 된 것이 결코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대한민국도 예외 없이 국제 구호단체인 코이카를 비롯, 크고 작은 민간 구호, 혹은 봉사단체가 수없이 많은 걸로 알고 있다. 그런데 일부 구호 단체가 허울 좋은 이름을 내걸고 있지만 그 본연의 임무를 다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그것은 조직 운영의 문제에서부터 출발한다. 단체를 운영하다보면 당연히 실무자가 있어야하지만 본질에 어긋나게 조직이 비대해지면서 각종 기부금을 정작 어렵고 힘든 이웃에게 쓰여지기보다는 자체경비로 소모되는 역현상이 발생되기 때문이다. 물론 다수의 기부단체는 건전성을 유지하며 봉사하고 있지만 일부 구호단체가 어려운 이웃을 돕기 위한 것이 아니라 마치 직장이 되어, 직장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이 된다면 이 얼마나 아이러니한 일인가. 그 이면에는 좋은 일을 하는 단체에 함부로 간섭할 수 없는 불간섭의 성역을 교모히 악용한 저의가 있다면 이 또한 얼마나 개탄스러운 일인가. 그런 단체는 건전하게 단체를 이끌어가는 단체에 누를 끼치는 해악으로 존재할 뿐이다. 그러므로 기부단체와 봉사는 순수해야한다. 최소한의 경비를 지출하고 기부된 금전이나 물품이 제대로 쓰였는지 검증받아야 한다.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정의기억연대도 검찰의 수사가 끝나봐야 알겠지만 논란이 된 것은 투명성이 확보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 두고 볼 일이다. 또 기부금으로 운영되는 단체가 기부금도 쌓여 있는데 정부의 보조금은 왜 필요한가. 의문이다. 혹시라도 잿밥에 눈이 더 어두운 것은 아닐까. 기부와 봉사는 그야말로 모든 걸 내 던져야 한다. 구호단체의 장이 일종의 판공비 성향의 수당을 받는다는 것도 모순이다. 구호단체의 장은 명예로 그 직을 수행해야 한다. 어차피 봉사하기 위해 출발 했다면 왜 기부한 금액을 사용해야 하는가. 한 예로 전국에 있는 라이온스클럽이나 로타리클럽은 기부금을 모집하지도 않고 구성원 스스로가 회비를 내어 봉사활동을 하고 단체장은 당연히 판공비가 없다. 오히려 본인의 금전을 지출한다. 그것이 바람직하다. 또 기부의 문제점도 있다. 만약에 일부의 기부자가 양심에 비추어 볼 때, 보여주거나 과시하기위해서 혹은 편법적 기부를 악용한다면, 이 역시 바람직하지 못하다. 좋은 일는 숨어서 행하고 그 얼굴을 드러내지 말아야 한다. 겉으로는 남을 돕는다는 거창한 구호를 외치며 위선을 행하는 기부자, 구호단체는 사라져야 한다.

최근의 구호 단체의 사태는 극히 선의로 기부를 하거나 기부금을 올바르게 집행하는 단체에 속된 표현으로 ‘김 빠지게’한다. 허울을 덮어쓴 가면은 언젠가는 벗겨진다. 진정으로 인간의 숲을 푸르게 하려면 양질의 토양과 양질의 공기가 필요하다. 냄새나는 공기와 토양의 바탕 위에는 아름다운 꽃이 필 수가 없다. 작금의 한국사회는 경제는 물론 교육의 양이 눈부시게 발전 했지만 그릇된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본인이 뇌물을 받고 극단적 선택을 한 사람이나 가족의 비리 때문에 극단적 선택을 한 사람에게 그의 정신 운운하면서 미화하고 바른말을 하면 벌떼처럼 달려들어 집단으로 매도하고 매장하는 기현상이 사회 곳곳에 진영의 논리로 난도질 당하고 있다. 도대체 무슨 정신을 본받으라는 것일까. 민주화가 억압당하고 있을 때 목숨을 걸고 투쟁한 사람들은 모두 어디에 숨었는가. 내 가족이 잘못하고 내 친구가 잘못하면 쉬쉬하고 덮어둬야하는가. 진정, 정의는 어떻게 기억해야하는가.

김현탁 한국현대문학연구소 소장 문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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