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동진(東晉) 때 사람 왕휘지(王徽之 338-386 ?)는 명필 왕희지(王羲之)의 다섯째 아들이다. 왕휘지가 절강성 산음현에 살고 있을 때, 밤에 큰 눈이 내렸다. 사방이 온통 은빛이었다.

혼자서 시를 읊던 왕휘지는 갑자기 대규(戴逵)라는 친구가 생각나 작은 배를 타고 그를 찾아 나섰다. 하룻밤이 지나서 비로소 도착했는데 대문까지 갔다가 들어가지 않은 채 돌아갔다.

나중에 사람들이 그 까닭을 물었더니 왕휘지가 말하길 "본래 흥이 나서 갔다가 흥이 다해 돌아온 것이니 어찌 꼭 대규를 만나리오!"라고 했다. ‘승흥방우(乘興訪友:흥이 일어나 친구를 방문하다)’ 혹은 ‘설야방대(雪夜訪戴:눈 내린 밤에 대규를 찾아가다)’라는 고사다. ‘세설신어’에 나오는 이야기다.

흥취를 쫓아 먼 길을 가서 친구를 만나지도 않고 돌아온 왕휘지의 엉뚱하고 자유분방한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한편으로 감정에 충실한 솔직성과 상투적 만남을 거부하는 초연함도 볼 수 있다.

친구가 생각난다고 먼 거리를 한걸음에 달려가는 것도 흔치 않지만 보고 싶었던 친구 집 앞에서 발길을 돌릴 수 있는 것이 더 신기하다. 말이 없으면 성격이 퉁명하여 피곤한 스타일이라고 욕하며, 말이 많으면 채신머리없고 경망스럽다고 한다.

적당히 상대의 마음을 살펴서 처신하기란 더욱 어렵다. 나쓰메 소세키는 ‘풀베개’란 소설에서 "산길을 오르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이지(理智)만을 따지면 타인과 충돌한다. 타인에게만 마음을 쓰면 자신의 발목이 잡힌다. 자신의 의지만 주장하면 옹색해진다. 여하튼 인간 세상은 살기 힘들다"고 썼다.

얼마 전 더불어민주당은 공수처 설치법에 기권표를 던진 금태섭 전 국회의원을 징계했다. 그는 또 "조국, 윤미향 사태에 함구령을 내린 정당이 과연 정상인가"라고 얘기했다가 온갖 십자포화를 맞았다.

이미 친문 지지자들에게 미운털이 박혀 경선에서 탈락했는데도 당론 위배행위를 이유로 징계까지 하는 건 오만함의 극치요, 기강 잡기와 다름없다. 일사분란한 집단사고의 종착지는 대재앙이다.

지지층만 바라보며 행동하는 것이 정치의 전부가 되어서는 안 된다. 반대의견은 다양한 생각을 만들고, 더 좋은 대안을 제시한다. 예전에는 헌법에 나와 있는 국민의 의무를 이행하고 성실히 사는 것이 애국이라 믿었다. 요즘은 애국도 진영논리가 있다.

주위를 의식하게 되고 까딱 잘못 말했다가는 친일파나 토착왜구가 된다. 누구의 잘못인가? 자신의 안위와 이익을 위해 영혼을 판 인간들이 진짜 친일파고 토착왜구다. 왜 양심을 판 인간들이 더 당당하고 큰소리를 치는가?

공자는 "아주 훌륭한 사람과 아주 어리석은 자는 바꿀 수 없다"고 말했다. 선한 자와 그렇지 않은 자는 타고난다는 뜻이다. 우리는 가끔 따분한 얘기를 ‘공자말씀’이라고 비하하지만 아직도 새겨들을만한 말이 많이 있다. 뻔뻔한 인간들은 시대를 초월해 항상 존재한다.

이제 왕휘지처럼 살기는 쉽지 않다. 세상이 바뀐 것이 확실하고 그것도 희한하게 돌아가고 있다. 자기 흥에 겨워서 스스로에게 떳떳했던 왕휘지의 언어와 처신이 눈치를 봐야 하는 세상이다.

이인재 전 파주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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