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때 ‘꼿꼿장수’라는 말이 화제가 되었던 일이 있었습니다.

2007년 남북 정상회담에 수행했던 우리나라 국방장관이 북한 김정일과 악수할 때 시선은 김정일을 바로 보고 고개와 허리를 숙이지 않고 꼿꼿하게 당당한 자세로 인사해서 국민에게 자존심을 갖게 해준데서 한 동안 입에 오르내렸습니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일제하 사면 팔방 누구에게 고개를 숙일 수 없다고 세수를 꼿꼿하게 서서 했다는 얘기도 유명합니다

또 꼿꼿하기로 이름난 분으로 최익현 선생을 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대한제국 고종 황제께서 1895년 단발령(斷髮令)을 선포하자 ‘내 목은 자를지언정 내 머리칼은 못 자른다 (吾頭可斷 此髮不可斷)’고 외친 기백은 가히 하늘을 찌를 것 같습니다. 신체발부(身體髮膚) 즉, 몸과 머리털과 살갗은 부모로부터 받은 것이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훼손하면 불효라며 ‘머리털이 목숨보다도 중하다’는 유교의 가치관이 지금 시대에는 이해가 안되는 일입니다마는 당시는 만인이 우러러보는 기개였다고 하겠습니다.

후금(後金)을 건국한 누르하치가 죽고 1636년 병자(丙子)년 4월 11일 아들 홍타이지(皇太極)가 천자(天子)의 자리에 오르는 대관식인 수존호례(受尊號禮)의식을 거행하게 됩니다.

당시 조선이 큰 나라로 섬기던 명(明)나라가 쇠망의 길로 가고 새로운 후금 즉, 청(淸)나라가 건국하면서 두 나라 사이에서 조선이 처신하기가 힘든 상황이었습니다. 청나라가 등장하였어도 조선의 조정은 명(明)나라를 섬겨야 한다는 명분이 더 지배적이었습니다. 청(淸)나라는 오랑캐 나라라는 인식이 강했습니다. 진퇴양난의 기로에 선 조선에서 홍타이지 대관식에 사신이 가지 않을 수는 없었습니다.

이 때 대관식에 참석한 조선의 사신은 ‘나덕현’과 ‘이확’ 두 사람이었습니다.

좌우로, 서열에 맞추어 사람들이 도열해 있고 황제의 권위를 나타내는 높은 자리에 홍타이지가 자리를 잡았습니다.

공식 호칭인 관온인성황제(寬溫仁聖皇帝)를 선포하였습니다.

모든 신하와 사신들이 삼궤구고두, 세번 무릎 꿇고 머리를 땅에 닿게 아홉 번을 절하는 극진한 공경례를 합니다.

조선 사신 나덕겸과 이확의 차례가 왔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명(明)나라 황제만이 황제이지 청나라의 홍타이지는 오랑캐의 우두머리일지언정 황제로 인정할 수 없다는 굳은 신념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이 두 사신은 오랑캐 우두머리에게 삼궤구고두를 할 수 없다고 난동을 부리며 결코 절을 하지 않았습니다.

꼿꼿함의 진수를 보여주었습니다.

황제의 즉위식에 찬물을 끼얹은 이 두 사신을 홍타이지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이들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들에게 선물을 주고 홍타이지의 국서(國書)를 주고 귀국길에 호위기병을 붙여 주기까지 했습니다.

조선에 돌아온 이 두 사신에게 조정에서는 오랑캐 왕한테서 국서를 받아왔다고 오히려 탄핵을 당해 역적으로 몰아 삭탈관직을 하고 귀양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대관식에 모욕을 당한 홍타이지는 이미 마음 속에 양국의 관계는 끊어졌다고 마음을 굳히고 병자년 12월에 조선을 침략합니다. 이것이 병자호란(丙子胡亂)입니다.

사신이 절하지 않은 대신, 우리나라 인조대왕께서 청(淸)태종 홍타이지에게 신하(臣下)의 예를 갖추어 삼전도에서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의 치욕을 겪게 됩니다. 그리고 조선의 백성은 1천배, 만 배 이상의 고통을 받고 왕세자들과 대신들을 비롯 수많은 사람들이 심양으로 인질이 되어 갔고, 청나라에 조공을 바치고 국고는 바닥이 나고 나라가 처참하게 되는 지경이 되었습니다.

시대를 읽지 못하고 흐름을 파악하지 못한 꼿꼿함이 국난을 불러일으킨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 후 조선은 250여년간 청나라의 종속국으로 지배를 받았습니다.

약자가 목을 꼿꼿이 세우고 눈을 부릅뜨고 소리질러서 강자가 굽히거나 굴복한 예가 없습니다.

명분과 실리의 대칭관계에서 어느 것을 선택하느냐는 쉬운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세월이 흘러 지금도 국가 간에 이해관계를 치밀하게 계산한다 해도 어느 것이 좋고 유익한 선택이 될지는 판단하기가 어렵다고 하겠습니다.

유화웅 시인,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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