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개통헌의(渾蓋通憲儀)’(보물제2032호), 실학박물관 소장
‘혼개통헌의(渾蓋通憲儀)’(보물제2032호), 실학박물관 소장

오늘날은 나침반과 시계가 있지만 과거 시간과 방위를 알기 위해서는 하늘을 봐야 했다. 그 때 하늘의 별과 태양을 관찰하는 것은 지금보다 큰 의미를 지녔다. 동양적 세계관에서 왕은 하늘을 보며 땅 위의 백성을 다스렸다. 하늘을 보며 농사 시기와 날씨를 가늠하고, 땅에 곡식을 키운 소출로 나라를 유지했다. 하늘은 땅과 더불어 동양 왕조의 헤게모니(hegemony)를 상징했다. 천원지방(天圓地方), 즉 둥근 하늘을 머리에 인 왕이 네모진 땅 위의 백성들을 다스렸다는 말이다.

오늘날의 말로 풀어보면 정보의 비대칭성을 권력으로 백성들을 통제했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조선 후기에 이르러 많이 달라졌다. 서양의 근대 과학은 세상이 둥글기에 중심이 없고, 별은 태양을 중심으로 회전하고 있다고 말했다. 코페르니쿠스적 전환, 세상이 뒤집힌 것이다. 이것을 극적으로 상징하는 유물이 실학자 유금(柳琴, 1741~1788)의 ‘渾蓋通憲儀’(혼개통헌의, Astrolabe)다.

‘혼개통헌의(渾蓋通憲儀)’(보물제2032호), 실학박물관 소장
‘혼개통헌의(渾蓋通憲儀)’(보물제2032호), 실학박물관 소장

작년 6월 26일 보물 제2032호로 지정되면서 정보들은 많이 쌓였다. 관련 설명을 찾아보면 이슬람과 유럽의 천문관측기구인 ‘Astrolabe’(아스트롤라베)를 우리 실정에 맞게 변형해 만든 것이라고 소개되고 있다. 실제 유물을 들여다보면 특이한 점들이 눈에 많이 띈다. 혼개통헌의는 전체 길이가 20cm 내외의 1kg이 채 안 되는 구리로 만든 원판형 의기다. 앞면에는 하늘의 북극과 남북회귀선, 적도, 그리고 24시간이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우리에게 익숙한 물고기자리(雙魚), 사자자리(獅子), 전갈자리(天?) 등 서양의 황도12궁이 한자로 적혀 있다. 즉, 유금의 혼개통헌의는 손바닥 두 개만한 휴대용 시계이며 앞뒷면에 동서양의 천문지식이 녹아 있다는 말이다.

특히 유금이 혼개통헌의를 제작한 시기는 유물 뒷면 윗꼭지에 적혀있는 대로 ‘乾隆丁未爲’, 즉 조선후기 사회적인 변화가 한창이던 1787년(정조 11)이다. 당시는 서양의 근대과학이 수원화성의 거중기(擧重器)로, 탁상위의 자명종(自鳴鐘)으로 전해지던 시기다. 또한 조선후기 사회경제의 전반적인 변화로 백성이 새로운 계층이 떠오르던 때이기도 하다. 즉, 왕의 전유물이었던 하늘이 혼개통헌의에 압축되어 백성의 호주머니로 들어온 것이다. 서자 출신의 신분적 제약으로 천문학과 율력(律曆)에도 조예가 깊었음에도 웅지를 펴지 못한 실학자 유금의 업적은 여기에 있다고 본다.

방문식 실학박물관 학예연구사 방문식

저작권자 © 중부일보 - 경기·인천의 든든한 친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