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 현장에서 미래를 그리다] 남양주 독립운동가 이석영, 모든 걸 바쳐 세운 '신흥무관학교' 독립운동 새 길 열다
[항일 현장에서 미래를 그리다] 남양주 독립운동가 이석영, 모든 걸 바쳐 세운 '신흥무관학교' 독립운동 새 길 열다
  • 김기영
  • 기사입력 2020.06.24 17:15
  • 최종수정 2020.06.24 2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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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유릉 앞에 조성 중인 이석영 광장
홍유릉 앞에 조성 중인 이석영 광장

1910년 12월 30일 추위가 기승을 부리는 이른 새벽, 한 무리의 사람들이 칼바람을 맞으며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넜다. 이들은 이석영(李石榮, 1855~1934)을 비롯한 6형제와 그 가족들이었다. 당시 청년교육에 앞장섰던 월남 이상재가 이 소식을 듣고 이렇게 탄식하였다.

"동서 역사상 나라가 망한 때 나라를 떠난 충신 의사가 수백, 수천에 그치지 않는다. 그러나 우당 일가족처럼 6형제와 가족 40여 명이 한마음으로 결의하고 나라를 떠난 일은 전무한 것이다. 장하다! 우당 형제는 참으로 그 형에 그 동생이라 할 만하다. 6형제의 절의는 참으로 백세청풍(百世淸風)이 될 것이니 우리 동포의 가장 좋은 모범이 되리라."

일제 강점기의 경험은 완전히 상반되는 인간상을 보여주었다. 일제에 빌붙어 부귀와 영화를 탐한 친일 매국노가 있는가 하면 조국의 독립과 광복에 모든 것을 바친 애국지사가 있다. 후자의 사례 중에서도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몸소 실천한 우당 6형제 일가는 독립운동의 최고 가문으로 손꼽힌다. 독립운동에 먼저 뛰어든 우당(友堂) 이회영(李會榮 1867∼1932)의 권유로 건영·석영·철영·회영·시영·호영 등 6형제는 모든 재산과 전답을 처분하고 엽전 26가마를 마련하여 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이주를 한다. 그중에서도 이석영은 가곡리의 소유 전답 6천석 토지와 가산을 매각하여 당시 쌀값 기준으로 현금 40만 원을 내어놓았다.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의 10세손인 영석(潁石) 이석영은 이유승(李裕承)의 둘째 아들이었는데 조선 말기 영의정을 지낸 개화파의 문신인 같은 집안의 귤산(橘山) 이유원(李裕元)에게 입양되어 남양주시 화도읍 가곡리의 임하려(林下廬)에서 살았다. 이유원은 대원군의 정적으로 꼽히기도 했던 인물로서 남양주에서 서울까지 남의 땅을 밟지 않고 왕래했다는 말을 들을 정도의 갑부였다. 이석영은 이런 양아버지 이유원으로부터 엄청난 재산을 물려받았다. 21세에 과거에 급제해 승지를 비롯한 요직을 지내고 종2품 가선대부에까지 오르지만, 벼슬이 적성에 맞지 않고 몸이 약해 직무를 감당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사직 상소를 올리고 관직에서 물러났다.

이석영의 살았던 집터의 현재 모습
이석영의 살았던 집터의 현재 모습

압록강을 건넌 6형제의 일가족들은 1월 초순 안동을 떠나 황도촌(黃道村)에 도착하여 얼마를 머문 후에 다시 출발하여 영하 20∼30도의 추위 속에서도 새벽부터 북으로  달렸다. 여자들은 마차 안에 태우고 남자들은 스스로 말을 몰아 길을 재촉하여 유하현 삼원보(三源堡)로 향하였고 최종 목적지인 추가가(鄒家街)에 도착했다. 이때가 이미 2월 초순이니 한 달여 만에 망명의 대장정을 마친 것이다. 6형제 일가는 삼원보에서 서쪽으로 십여 리쯤 떨어진 추가가에 새로운 둥지를 틀기로 했다. 이곳은 이미 1910년 8월 이회영과 이동녕 일행이 서간도 답사 때 이곳 이주민들에게서 정보를 듣고 직접 답사하고 무관학교 설립의 적격지로 점찍은 곳이다.

이회영 일가가 만주에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하기 위해 떠났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신민회 간부나 의병활동자 등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삼원포 일대로 이주해서 합류하게 되는데, 안동 유림의 거두인 석주 이상룡과 김대락·황호·김동삼 일가 등이 대표적이다. 그들은 국내의 재산을 처분하여 자금을 마련한 뒤에 1911년 1월부터 3월까지 압록강을 건너 삼원보의 추가가에 도착하니 그 일대는 곧 한인촌처럼 변하게 되었다.

거금을 들여 토지를 확보한 후 이곳에 모인 항일지사들이 가장 먼저 시작한 사업은 경학사(耕學社)와 신흥강습소의 설립이다. 경학사는 만주 일대 한국인 혁명 결사의 개시이며 이주 한인들의 단결과 자치를 도모하는 뜻으로 조직된 것이다. 경학사 건설을 마친 항일지사들은 신흥강습소 설립을 서둘렀는데 현지 중국인의 옥수수 창고를 빌려 개교식을 거행하였고 이렇게 해서 신흥무관학교의 첫 깃발이 올랐다. 신흥강습소의 교장에는 이회영의 형인 이철영을 추대하고 본과와 특별과의 두 과를 두었는데, 본과는 중학 과정이며, 특별과는 사관(士官) 양성의 속성과였다. 신흥강습소는 합니하(哈泥河)에 군사훈련과 함께 중등 교육과정을 가르칠 수 있을 정도의 시설을 갖춘 새로운 학교가 세워지면서 자연히 신흥무관학교 또는 신흥중학교로 변모하였다. 즉, 1913년에는 신흥중학교로 개칭하고 군사반을 두었고, 1919년에는 중학교를 폐지하고 신흥무관학교로 개칭하여 1920년 폐교 때까지 3천500여 명의 독립군을 배출하였으며 이들은 청산리대첩 등에서 많은 전공을 세우게 된다.

화도읍 가곡리의 임하려 부근에 있는 은행나무
화도읍 가곡리의 임하려 부근에 있는 은행나무

그 와중에 항일지사들이 겪은 고초는 필설로 다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장래의 독립군을 육성하는 신흥무관학교의 학비와 숙식은 무료였는데 흉년 때문에 미곡이 천정부지로 뛰어올라 그 많던 자금이 바닥을 드러냈다. 몇몇 개인의 기부와 헌신만으로 한인촌을 건설하고 무관학교를 운영하는 것은 벅찬 사업이었다. 더구나 1913년 봄에는 이회영·이동녕·이시영·장유순·김형선(金瀅璇) 등 5명의 지사를 암살하거나 체포하기 위하여 일본 고등계 형사들이 만주로 출발할 계획이라는 정보를 입수하여 이회영은 독립운동자금을 모으기 위해 국내로 잠입했고, 이시영은 심양으로, 이동녕은 러시아로 떠났으며, 학교의 주인인 이석영은 남아서 학교와 가족을 돌보기로 하였다. 동생들과 동지들이 떠나자 생활은 물론 학교 운영도 더욱 어려워졌다. 마적들에게 끌려갔기도 했고 가족들이 총상을 입는 등의 위험한 환경에서 10년을 버티던 이석영도 결국은 1920년 무렵에 북경으로 터전을 옮기게 된다. 하지만 중국에서의 도시 생활도 녹록하지 않았다.

영석(潁石) 이석영 선생의 초상화
영석(潁石) 이석영 선생의 초상화

1920년대 후반이 되면 독립운동의 자금줄이 막혀서 모두가 어려웠다. 상해에서 발행되던 ‘한민(韓民)’ (1936년 5월)에 실린 글에서는 "이석영이 수많은 재산을 신흥무관학교 운영에 모두 쏟아붓고 나중에는 지극히 곤란한 생활을 하면서도 한 마디 원성(怨聲)이나 후회하는 빚이 조금도 없고 태연해 장자(壯者)의 풍모가 있었다."라고 평가하였다. 이석영의 말년에는 곤궁함이 절정에 달하였다. 가산은 탕진되고 일제의 세력은 만주에까지 뻗쳐서 항일지사들도 사방으로 흩어지게 된다. 선생도 그곳에서 살 수가 없어 천진·북경·상해 등으로 떠돌아다니게 되었으며 그러던 중에 큰아들 규준(圭俊)은 독립운동 진영에 피해를 주는 자들을 체포·암살하는 ‘다물단’의 단장으로 활동하던 중 북경에 갔다가 암살되었으니 선생의 신세가 참으로 기구하게 되었다. 그는 고령에 만고풍상(萬古風霜)을 겪다가 병을 얻어 중태에 빠졌으며 국내에 와서 치료를 받은 후에 다시 중국의 상하이로 흘러가서 동서를 표박(漂迫)하였는데 곤란은 더욱  심하여지고 기아선상에서 두부 비지로 연명하다가 영영 세상을 떠나 머나먼 중국 땅의 공동묘지에 묻히고 말았다.

글·사진=김기영 위례역사문화연구소 연구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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