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웅보전
 

그윽한 정취 품은 빛바랜 단청의 대웅보전

대중에게 아주 유명한 절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고령산 자락, 이 깊고 아늑한 도량에는 젊은 객들의 방문이 끊이지 않는다. 간혹 대웅전에 들어가 부처님께 삼배를 올리는 불자들도 있지만 그보다는 잠시 절을 둘러보고 가는 이들이 많다. 코로나 바이러스 탓에 거리두기 여행지로 사찰만한 곳이 없는 이유도 있지만 보광사 주변이 온통 나들이 명소인데다 보광사 그 자체로 일부러 들러볼만한 가치가 있는 까닭도 크다.

사찰은 일주문이 도로와 가깝고 경내에 이르는 진입로가 60m 남짓이라 산사(山寺)치고 접근성이 좋은 편이다. 그렇다고 해서 일주문만 보고 즉흥적으로 들어설만한 개방성을 가진 절은 아니다. 즉 전국적인 명성의 사찰이 아님에도 방문자의 대부분은 미리 ‘알고’ 찾는 절이란 의미다. 추측컨대 근처 계곡이나 캠핑장을 인터넷으로 검색하다가 누군가의 보광사 방문 후기를 접했고 그 후기를 통해 본 사찰의 분위기가 마음에 들어 행선지로 굳힌 이들이 많지 않을까 싶다. 그들을 사찰로 이끈 키워드 두 가지를 꼽는다면 ‘대웅보전’과 조선 제21대왕 ‘영조’가 아닐까.

많은 이들이 국내 유수의 사찰에 방문했을 때 단청이 빛바랜 목조 전각을 보고 반가워한다. 단청은 시간이 흐르면서 퇴색할 수밖에 없기에 본래 나무의 결과 색이 드러난 전각 앞에서 건물의 유구함을 직감하는 것이다. 부석사 무량수전, 내소사 대웅보전, 봉정사 대웅전, 미황사 대웅전 등이 대표적이다. 미술사학자 최순우는 부석사 전각들을 두고 ‘그리움에 지친 듯 해쓱한 얼굴’이라고 표현했다. 빛바랜 단청 건물에 대한 시적 감상이다. 습하고 뜨거운 여름이 있고 전쟁이 끊이지 않았던 나라에서 단청이 희끄무레해지도록 살아남은 옛 목조 건물은 드물고 귀하다. 그래서 직접 마주했을 때의 감흥은 남다를 수밖에 없다. 보광사 대웅보전도 그렇다.

오래된 목조 건물에 색을 덧입히지 않는 이유는 당연히 처음 칠했던 단청을 보존하기 위함이다. 고박한 건물들도 한 때는 화려하고도 고운 색채의 단청을 뽐냈을 것이다. 단청은 단순히 멋을 내기 위함이라기보다 목재의 갈라짐과 썩음을 막는 실용적인 목적과 불교의 교리를 미적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목적을 갖는다. 따라서 단청 문양의 종류와 회화적 기법, 회화 소재들의 상징은 매우 다양하며 아는 만큼 보이는 전문가의 영역이기도 하다. 나들이 삼아 절에 들른 일반인들에게는 재해와 전쟁의 풍파를 견딘 목조 전각의 고색창연함에 감탄하는 것만으로도 감상은 충분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 문장을 단청에 할애한 까닭은 보광사 대웅보전을 마주한 이방인의 시선이 단지 전각의 전체적인 풍치에만 머물지 않기 때문이다.
 

대웅보전 북측 판벽화 좌측 백의관음 우측 보현보살과 흰코끼리
 

기백 넘치는 흰 코끼리, 귀여운 동자들…, 눈을 뗄 수 없는 판벽화

보광사 대웅보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1622년 중창한 후 여러 차례 보수를 거쳐 왔다.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83호로 지정된 대웅보전은 화려한 공포와 섬세한 조각, 봉안된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과 2구의 협시보살상 등이 그 가치를 더하는데 전각의 하이라이트는 건물 동, 남, 북 삼면의 벽화다. 보편적인 흙벽이나 회벽이 아닌 나무 벽체로 이루어진 외벽에는 민화를 연상케 하는 19세기 후반의 불교 벽화가 그려져 있다. 경내로 들어서는 방향이기에 가장 먼저 눈에 띄는 벽화가 북쪽 우측에 그린 코끼리를 탄 보현보살이다. 벽면의 상당부분을 차지한 코끼리는 매우 다부진 외형이다. 굳건하게 땅을 딛고 있는 네 발, 날렵하고 강인해 보이는 눈매는 등에 앉은 보현보살만큼 호방한 기세를 뿜어낸다. 보기에는 회색빛 코끼리지만 불교에서 상서롭게 여기는 ‘흰 코끼리’다. 줄리아 로버츠 주연의 영화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에는 주인공 리즈가 인도에서 운명처럼 코끼리를 마주치는 장면이 있다. 리즈는 조심스레 코끼리에게 다가가 기대고 오랫동안 어수선했던 그녀의 마음에는 일순 평화가 찾아온다. 영화 속 코끼리가 주인공에게 그러했듯, 보광사 대웅보전의 흰 코끼리가 여느 이방인에게 안온함을 전한다고 하면 비약일까. 모르긴 몰라도 흰 코끼리와 보현보살 벽화를 한참동안 바라보는 이들이 적지 않다.

좌측 그림은 고해(苦海)를 건너는 중인 백의관음보살의 모습이다. 섰던 자리에서 그대로 건물 뒤로 가면 벽면 가득 그려진 연꽃대좌 위의 동자와 보살, 아미타부처님을 볼 수 있다. 가까이 다가가 그들의 얼굴을 보면 흐뭇한 미소가 절로 지어진다. 외람되지만 오동통한 볼과 제각기 다른 표정의 얼굴들이 몹시 귀엽다. ‘귀여움’은 남쪽 벽면의 사자를 탄 문수보살 벽화에서도 느낄 수 있다. 문수보살을 태우고 느긋하게 뒤를 돌아보는 사자의 모습은 오늘날에 그린 현대적인 캐릭터라고 해도 믿겨질 만큼 세련되고 친근하다.
 

응진전과 대웅보전, 만세루
 
지장전과 무영탑
 
호국대불상에서 바라본 경내 (1)
 
호국대불상에서 바라본 경내 (2)
 

도량 곳곳에 남아있는 어머니 위한 마음

이쯤 되면 영조의 친필로 알려진 대웅보전 현판은 조연급 문화재가 되는 것 같지만 보광사는 영조의, 영조에 의한, 영조를 위한 사찰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보광사의 역사는 통일신라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런데 1740년 영조가 어머니 숙빈 최씨의 명복을 비는 원찰로 삼으면서 그 위상이 높아졌다. 숙빈 최씨의 능인 소령원은 사찰에서 북쪽으로 약 4km 떨어져 있다. 현판 역시 건물의 역사만큼 낡았지만 점잖고 올곧은 서체에선 묵직한 힘이 느껴진다. 본당의 전면부에서 현판 못지않게 시각을 압도하는 것은 단연 웅장한 지붕과 지붕처마를 받친 공포다. 불교 건축에 문외한 사람이 보아도 매우 정교하고 화려함을 느낄 수 있는데 특히 공포 끝에 새긴 수(壽), 복(福) 등의 길상문자는 원찰에서 볼 수 있는 드문 장식이다.

대웅보전 맞은편 건물은 만세루인데 처마에 걸린 목어가 인상적이다. 절집 목어는 보통 범종누각에 걸려 있기에 자연스레 시선이 간다. 영문은 알 수 없지만 곧 용이 되어 날아갈 모양새를 보아하니 범종각이 좁아 바깥으로 나왔나 싶다. 만세루 바로 옆에 범종각이 있다. 그 안에 걸린 ‘숭정칠년명동종’은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58로 지정된 조선후기 범종으로 보호를 위해 진품은 대웅전 안에 보관하고 있다.

대웅전을 바로 보고 오른쪽에 있는 맞배지붕 전각 원통전 뒤로 가면 야트막한 언덕 위에 자리 잡은 어실각과 그 옆에 호위무사처럼 서 있는 향나무를 볼 수 있다. 어실각은 숙빈 최씨의 위패를 모신 전각이다. 정면 1칸, 측면 1칸으로 사찰에서 가장 작은 건물이지만 다른 절에서는 볼 수 없는 특별한 건물이다. 향나무는 영조가 심었다고 전해진다. 어머니를 지켜달라는 영조의 바람대로 향나무는 뿌리 내린 지 300년이 훌쩍 지난 오늘까지도 성하고 푸르게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다.
 

보광사 전나무숲 (3)
 
보광사 전나무숲 (1)
 
보광사 전나무숲 (2)
 

전나무숲에 앉아 풍경소리 들으며 힐링

절을 한 바퀴 돌아봤다면 지장전과 원통전 사이에 나있는 남쪽 담장 문으로 나가보기를 권한다. 개울의 낭랑한 물소리를 들으며 비탈길을 조금만 올라가면 전나무 쉼터라 표목을 세운 숲 입구가 보인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쭉쭉 뻗은 울울창창한 전나무 군락은 보광사의 든든한 울타리이자 근사한 병풍 역할을 한다. 숲으로 들어서면 나무들 아래 여러 개의 벤치가 있어 잠시 앉아 피톤치드 삼림욕을 즐길 수 있다. 숲은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절과 맞닿아 있기에 바람이 불적마다 풍경소리가 청아하게 울려 퍼진다. 보광사에는 유독 풍경이 많아서 화음을 이룬 풍경소리가 음악처럼 들린다. 산새들이 지저귐은 곧 노래가 된다. 이방인은 그저 장단만 맞추면 그만이다. 치유의 숲이 따로 없다.

사찰의 가장 높은 지대에 우뚝 선 석불은 1981년 조성한 높이 12.42m의 호국대불이다. 석불에는 진신사리와 각종 불경 등을 봉안했다. 호국대불은 중생의 두려움을 없애주고 평안함을 준다는 뜻의 수인인 시무외인을 취하고 있다. 호국대불을 가만히 바라볼 수 있는 자리에 벤치가 설치되어 있다. 쉬어가라는 배려도 고마운데 평안을 빌어주는 부처님까지 눈앞에 서계시니 근심과 욕심은 사라지고 마음은 고요해진다. 호국대불을 모신 석불전 옆 다리를 건너면 고령산 안의 암자 도솔암으로 향하는 등산로가 있다. 석불전에서 700m 거리다. 경사가 가파르고 노면이 고르지 않지만 산사의 정취를 한껏 느끼고 싶다면 올라가봄직 하다.
 

송추평양면옥 (2)
 
송추평양면옥 (1)
 

여기도 가보세요

보광사 주변은 숲과 계곡, 호수가 어우러진 자연 관광지가 많아 하루나들이 코스로 돌아보기 적당하다. 보광사에서 가장 가까운 명소는 자동차로 10분 거리에 있는 마장호수 유원지다. 2017년 개장한 길이 220m의 마장호수 흔들다리는 파주의 새로운 랜드마크로 보도용 현수교 중 국내 최장 길이를 자랑한다. 자동차로 15분 거리에는 장흥관광지가 있다. 배우 임채무 씨가 운영하는 놀이동산 두리랜드를 비롯해 양주시립 장욱진미술관, 장흥자색수목원 등이 이 일대에 모여 있다. 식사할 만한 식당으로는 장흥관광지와 가까운 평양면옥(양주시 장흥면 호국로 515)을 추천한다. 평양면옥이라는 상호가 워낙 많아서 보통 ‘송추평양면옥’으로 불린다. 1980년 개업한 평양냉면 전문점으로 평안도식 전통을 살려 소고기 육수에 꿩 육수, 동치밋국을 섞은 감칠맛 나는 국물을 낸다. 육향은 무겁지 않고 단맛은 은은해서 평양냉면 특유의 ‘슴슴함’이 살아있다. 냉면의 꾸미에는 꿩의 살코기와 뼈를 다져 뭉친 꿩 경단이 올라간다. ‘평양냉면 마니아’라면 결코 지나칠 수 없는 냉면 순례지다.

글·사진 여행작가 유승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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