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3세기 동아시아의 세계관

10~13세기 동아시아에는 여러 나라들이 있었다. 10세기 전반 중국 중남부에는 후량·후당·후진·후한·후주의 5대와 오·남당·오월·민·형남·초·남한·전촉·후촉·북한의 10국이 할거했다. 이들은 송으로 통일되었다. 북부에는 고구려계 유민과 말갈족의 발해를 멸망시킨(10세기 전반) 거란족의 요(遼)가 있었다. 요나라는 또 여진족의 금(金)에게 멸망했다(12세기 전반). 또 중국 서북부에는 티벳 계통의 서하가 있었고, 고려의 남쪽에는 일본이 있었다. 이들은 모두 자신들이 세상의 중심이라는 세계관(천하관)을 가졌다. 고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천하를 다스리기 위한 황제제도를 운영했다. 각국의 국왕은 황상(皇上), 황제로 불렸고, 이를 뒷받침하는 국가시스템을 작동시켰다. 그러면서도 교류에서 힘의 균형이 비슷하면 교린(交隣) 관계를, 그렇지 못하고 다른 한쪽에 쏠리면 작은 나라인 제후가 큰 나라인 황제를 섬기는 사대(事大) 관계를 맺었다. 그렇지만 사대관계를 맺었더라도 국내에서의 황제제도는 그대로 운영됐다. 중국 남부의 송과 북방의 거란은 각각 동아시아의 패자를 자처하며 경쟁 관계였지만, 한때 송은 거란과 사대 관계를 형성했다. 금나라에서 고려에 보낸 공문에 고려국왕은 ‘고려국황제’로 쓰여 있었다.
 

청백자 꽃 모양 접시: 송나라에서 고려에 들어온 꽃모양이다. 양국의 교류관계를 보여준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사진=경기도박물관
청백자 꽃 모양 접시: 송나라에서 고려에 들어온 꽃모양이다. 양국의 교류관계를 보여준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사진=경기도박물관

천하의 중심, 해동천하 고려

고려가 운영했던 세계는 해동천하(海東天下)였다. ‘해동(海東)’이란 지리적으로 ‘중국 바다의 동쪽’이란 뜻으로, 고려 이전시기부터 동아시아 각국에서 우리를 지칭하는 말로 사용됐다. 고려 사람들은 ‘해동(고려)’이 중국과 구분되는 역사문화를 가진 곳이라는 뜻에서 별건곤(別乾坤)이라고 했다. 여기서 ‘건곤’이란 ‘하늘과 땅’, ‘세상’이란 말로, 중국과 뚜렷이 구별[別]되는 또 다른 ‘건곤(세계)’이 해동천하 고려였다.

고려는 대내외적으로 황제의 나라를 표방했다. 동아시아의 여러 나라들은 자신들의 천하가 독자적인 천명을 받았다는 상징으로 연호(年號)를 사용했는데, 고려 태조 왕건의 연호는 ‘천수(天授)’였다. 고려의 건국이 하늘에서 받은 명령을 따른 것이라는 뜻이다.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태조1년, 태조2년 등의 기년(紀年)을 당시 사람들은 천수1년, 천수2년으로 사용했다. 또 그의 아들 광종은 ‘준풍(埈豊)’이란 연호를 제정했다.

1992년 개성에 있는 현릉(왕건릉)을 수리하다가 해동천자(海東天子)인 왕건의 모습을 실물 크기로 만든 왕건상(王建像)이 수습됐다. 청동으로 만든 이 조각상은 황제국의 또 다른 장치로 수도인 개경을 황도(皇都)로 정한 광종 때 만들어져 태조를 기리기 위해 건립된 봉은사(奉恩寺)라는 사찰에 모셔졌다. 황제가 쓰는 통천관을 머리에 쓴 나체의 왕건상은 앉은 모습으로, 매년 황제의 옷인 황의(黃衣) 또는 청의(靑衣)를 번갈아 입었고 옥으로 만든 허리띠를 찼다. 고려 황실에서는 매년 2월의 연등회와 6월의 기일, 그리고 천도 등 국가적으로 중요한 결정을 할 때마다 제사하며 나라의 평안을 기도했다. 조선 건국 후에는 고려 왕실의 사당으로 세워진 숭의전(연천)으로 옮겨졌다가 세종 때 다른 고려황제의 초상과 함께 왕건릉 주변에 묻혔다가 발견된 것이다.

고려 태조 왕건상: 왕건상은 황제를 상징하는 황의(黃衣)를 입었고, 안면, 입술, 눈 등에도 살아있는 사람과 같이 염료를 이용해 화장을 했다. 현재는 평양의 조선중앙력사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사진=경기도박물관
고려 태조 왕건상: 왕건상은 황제를 상징하는 황의(黃衣)를 입었고, 안면, 입술, 눈 등에도 살아있는 사람과 같이 염료를 이용해 화장을 했다. 현재는 평양의 조선중앙력사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사진=경기도박물관

고려에서는 제왕부(諸王府)가 운영됐다. 황제와 태자를 제외한 왕자, 궁주(공주) 등은 여기에 소속되어 남성의 경우 조선국공(朝鮮國公), 낙랑국공, 진한국공, 여성의 경우 조선국대부인, 변한국대부인 등으로 봉해졌다. 고려에 앞서 있었던 나라들의 역사문화를 계승한다는 뜻이 담겨져 있었다. 또 여진과 탐라는 번국(藩國, 제후국)으로 여겨져 고려에서는 그 추장에게 벼슬을 주어 관리했고, 그 사절들은 대표적인 축제인 팔관회에 참석하여 고려황제에게 예를 갖추어 선물을 바쳤다. 이때 송·거란·일본·동남아시아는 물론 아라비아상인들도 참석하여 교역했다. 현재 개성시 개풍구역 신서리에 있는 벽란도는 교역의 중심이었고, 그곳에는 외국상인들이 묵는 여관인 벽란정이 있었다.



고려의 중심, 경기

우리 역사에서 ‘경기’ 제도의 시작은 1018년(고려 현종 9)이다. 고려시대의 ‘경기’는 고려의 황도인 개경(개성)을 중심으로 황해도 일부와 현재 경기 북부를 범위로 했는데, 황도를 아우르는 12~13개 군현(시군)로 구성되었다. 이때 ‘경기’는 황기(皇畿)라고도 불렸는데, 지금의 국무총리실 격인 상서도성에 소속돼있거나, 개성부라는 특별행정구역에 속해 있어 현재의 모습과는 조금 달랐다. 경기인(京畿人)들은 황기인(皇畿人)이었다.

 

동여비고: 고려시대 경기도 주변을 그린 지도이다. 현재 경기도는 31개 시군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고려의 경기는 13개 군현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개인소장(국립제주박물관 기탁) 사진=경기도박물관
동여비고: 고려시대 경기도 주변을 그린 지도이다. 현재 경기도는 31개 시군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고려의 경기는 13개 군현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개인소장(국립제주박물관 기탁) 사진=경기도박물관

고려의 경기는 해동천자가 펼치는 정치·경제·사회·문화의 중심이었다. 경기에서는 국내의 다른 지역은 물론, 동아시아의 여러 나라들과 빈번한 교류가 이루어져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갔다. 경기인들은 그 중심에 있었다. 송나라 역사책인 ‘송사’에서는 12세기 고려 인구를 210만으로, ‘고려사’에서는 몽고군의 침입을 피하기 위해 강화로 도읍을 옮길 때인 13세기 중엽의 경도京都(개경) 인구를 10만호으로 기록하고 있다. 1호의 인구수를 4~5명으로 볼 때, 40~50만명으로 추산할 수 있다. 그런데 경도는 왕경을 이르는 것으로, 왕성王城 안의 인구를 40~50만으로 보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 이 숫자는 개경과 경기가 포함된 왕경개성부의 호수와 인구로 파악할 수 있다. 즉 당시에도 전체 인구 25% 정도가 서울과 경기에 모여살고 있었다. 그들은 각종 토목공사와 연등회·팔관회 등에 노역과 공물을 납부하면서 고려황제의 시혜를 동시에 받는 존재였다. 또 11세기 활동했던 경기인 한안인(韓安仁)은 왕실을 제외하고 최초로 본관 지역으로 경기의 장단[湍州, 현재 파주]을 받기도 했다.

고려인의 얼굴을 새긴 기와: 죽주(안성) 봉업사터에서 출토된 기와 조각이다. 당시 죽주에 살던 사람인지, 봉업사에서 수도하던 스님인지 모르겠다. 봉업사는 태조 왕건의 초상을 모시고 있던 몇 되지 않는 진전사원이었다.    사진=경기도박물관
고려인의 얼굴을 새긴 기와: 죽주(안성) 봉업사터에서 출토된 기와 조각이다. 당시 죽주에 살던 사람인지, 봉업사에서 수도하던 스님인지 모르겠다. 봉업사는 태조 왕건의 초상을 모시고 있던 몇 되지 않는 진전사원이었다. 사진=경기도박물관

경기인들은 귀화하여 인근지역에서 마을을 이루며 살고 있던 발해, 거란, 여진 출신들과 어울리며 그들의 문화를 포용했다. 고려의 금속공예품에서 확인되는 북방 요소들은 이와 관련이 있다. 또 그들은 개경에 있던 몽고식 만두집인 쌍화점에서 아라비아사람들을 접하기도 했다. 경기문화는 그런 가운데 만들어졌다. 그런 경기인들의 ‘경기인’에 대한 정체성은 현재와 비슷한 같은 수준이라 할 수 있다. 경기도박물관의 새로운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된다.

김성환 경기도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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