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세(亂世)는 기존의 구질서가 허물어지고 새로운 질서로 다시 태어나기 위한 변화의 시간이다. 얼핏 들으면 좋은 말 같다. 반대말은 태평성대를 뜻하는 치세(治世)다. 역사를 보면 태평성대는 없다고 해도 무방하다. 세상은 항상 시끄럽고 혼돈 속에 있었다.

삼국지에 나오는 조조는 사람을 잘 알아본다는 허소(許劭)란 사람으로부터 ‘치세지능신(治世之能臣)이요 난세지간웅(亂世之奸雄)’이란 평가를 듣고 기뻐했다고 한다. 태평성대에는 유능한 신하겠지만 난세에는 간사한 지혜가 있는 영웅이라는 뜻이다.

어쨌든 조조는 혼란스럽던 후한 말에 등장해 삼국이 통일하는 기반을 닦았다. 소설 ‘삼국지연의’에는 잔인하고 간사한 사람으로 등장하나 탁월한 능력과 지모로 큰 업적을 이루었다. 정사(正史) 삼국지를 쓴 진수(陳壽)는 조조를 평가하면서 시대를 초월한 영웅이란 뜻의 ‘초세지걸(超世之傑)’이란 표현을 썼다.

지금은 난세인가? 문 대통령의 ‘한 번도 경험해보지 않은 나라’를 두고 찬반이 극명하고 서로를 ‘개돼지’라고 부르니 난세는 난세다. 대한민국은 외세에 의한 해방 이후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는 양대 축으로 성공한 나라다.

그 기본 틀을 바꾸려는 문 정권과 수호하려는 세력 간의 피를 말리는 투쟁이 벌어지고 있다. 정권 후반기를 잘 넘겨야 다음번 집권도 바라볼 텐데 추미애 사태를 비롯한 ‘정의와 공정’을 농락하는 일들이 계속 터져 알 수가 없다.

난세를 이겨내는 방법이 있나? 난세의 리더십을 대표하는 몇 가지 책이 있다. ‘한비자’와 마키아벨리의 ‘군주론’, 청나라 때 리쭝우(李宗吾)가 쓴 ‘후흑학(厚黑學)’이 그것이다.

이들 3대 저서 모두 왕이나 군주의 역할만 강조해 지금 난세에는 별로 들어맞지 않는다. 다만 인간의 본성은 원래 이기적이고 가까운 부부 사이조차 철저히 이해관계로 이뤄졌다는 것을 인정했단 점에서 일치한다.

리쭝우는 난세에 대해 재밌는 말을 남겼다.

"나는 난세의 영웅이 되고자 제자백가서와 역대 왕조의 역사서를 모두 읽었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결국 연구를 거듭한 끝에 난세의 성공비결은 낯가죽이 두꺼운 ‘면후(面厚)’와 속마음이 시꺼먼 ‘심흑(心黑)’에 지나지 않는다는 천고의 비결을 찾아내게 되었다."

난세는 ‘면후심흑’만 판치는 것이 아니다. 거짓이 진실을 덮고 있는 것을 넘어 진실을 왜곡하는 것도 난세다. 민생은 파탄 지경이고 안보와 국방이 흔들리는 것도 난세다. 어려운 국민 모두를 위한 정부의 작은 위로이자 정성이라면서 1인당 통신비 2만원씩 주는 것도 난세다.

통합을 말하면서 내 편, 네 편 가르고 증오를 부추기는 것도 난세다. 약자 편이라면서 약자 못살게 하는 것도 난세다. 자기편은 반칙과 편법으로 온갖 특혜를 누리고 있는 것도 난세다.

정권을 유지하는 과정에서 저지른 온갖 악행이 은폐되거나 선행으로 윤색되는 시간이 난세다. 극소수의 승자와 대다수 패자로 나뉘는 시대가 난세다. 난세에 영웅이 난다고 한다. 우리의 지난 난세도 마찬가지다. 물론 후세의 평가에서 그 영웅들의 모든 행동이 옳은 면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이 난세에 ‘맞섬’으로 보여준 용기는 사람들에게 힘을 주었다. 지금 난세의 영웅은 자기 분야에서 열심히 일하며 깨어있고 분노하는 국민이다. 사상가이자 민권운동가인 함석헌(1901-1989)은 "깨어있는 국민이라야 산다"고 역설했다.

잘 오지 않는 난세의 영웅을 기다리는 것보다 내가 난세의 영웅이 되는 길을 찾는 게 빠르다. 체념과 침묵의 대가는 치명적이다.

이인재 전 파주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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