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로 모두가 지친 사이 가을이 곁으로 왔다. 인생에 계절이 있다면 가을은 60대 전후가 아닐까 싶다. 무언가를 떨궈내야 할 때이지만 한풀 꺾인 여린 감성에 매달려 현역으로 남아있길 바라는 간절한 시절, 서정시 같은 순수의 역정이 되돌이표처럼 맴도는 느린 바이올린의 선율 같다. 이작 펄만의 브람스 바이올린 소나타, 안네 소피 무터의 사라사테 지고이네르바이젠을 조용히 듣고 싶은 계절이다.

오래된 서점에 가서 눅눅한 책 내음을 맡으며 빛바랜 시집 한권을 골라와 마음으로 읽고 싶다. 나의 화실에서 풍겨오는 테레빈 냄새와 묵은 책 냄새가 좋다. 오랜 여행에서 돌아와 이 냄새를 맡으면 어머니의 엷은 미소처럼 따뜻하여 좋았다. 나의 책장엔 어린 시절이 그대로 남아있다. 고향집에 쌓여있던 책들을 어머니가 나의 분신처럼 늘 바라보시는 모습이 그려져 차마 가져오지 못했다. 아버지 돌아가신 후 큰 충격에 무너지신 어머니는 오랫동안 병을 앓으시다가 지난해 그토록 못 잊던 아버님 곁으로 귀천하셨다.

나는 어머님이 자식처럼 잘 보관 해둔 책들을 모두 가져와 화실에 옮겨 놓았다. 이 책들은 모두가 유년시절 나를 돌아보는 것 같은 향수가 있다. 데미안, 달과 6펜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등 청춘문고와 함께 학원, 어깨동무, 현대문학 등의 메거진과 그 시절을 추억할 수 있는 만화책들도 이송되었다. 무엇보다 내가 공부한 밑줄 친 초등학교 국어, 역사, 미술, 등의 교과서도 남아있어 보물창고가 따로 없다. 오랜 친구 같은 책들을 늘 곁에 두고 학창시절의 향기를 맡을 수 있어 고향의 일부처럼 넉넉한 위안이 된다. 이 모두가 단 한권의 책도 소중히 간직해주신 사랑하는 어머니 덕분이라고 생각하니 항상 고맙고 그립다.

다시 가을이 오고 책 향기가 단풍잎처럼 무르익는 서가를 바라본다. 가끔 가을이 오는 것이 불면증처럼 우울하다. 떠나가신 부모님과, 나보다 먼저 간 후배 작가와, 여름마다 스케치를 함께 다녔던 요절한 선배도 그립고, 구월에 떠난 정든 사람이 보고 싶다. 죽음이 가르는 영원한 이별도 슬프지만 지척에 두고도 만날 수 없는 생이별은 유리벽처럼 고통스럽다. 더구나 코로나로 인한 사회적 거리두기는 물리적 정신적 폐쇄를 동시에 견뎌야해 심란하다.

남자의 가을은 여자의 봄처럼 따뜻한 자극에 반응하여 꽃잎 같은 연정을 부풀려 가는 것이 아니라 쓸쓸함에 움츠려 사랑과 추억을 삭이는 독백 같은 습성이 있는 것 같다. 옛 애인 같은 늙은 LP판에서 불안정하게 흐르는 카잘스의 첼로 같은 계절. 늘 작업실에 홀로 있으면 먼들에서 풍겨오는 들깨 향기와 메밀꽃 핀 풍경과 갈바람 소리가 그립다. 문을 열면 높고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고추잠자리들이 어릴 적 뛰놀던 동무들처럼, 아름다운 시집의 조어처럼 맴돌고 있다.

가을은 만남 보다 이별이 어울리는 계절 같다. 지속할 수 없었던 제자와의 사랑을 끝내 접고 ‘이별의 노래’를 쓴 박목월 시인처럼. 사랑은 가도 옛일은 회억되는 것. 안녕이 재회의 약속이듯 이별 뒤엔 또 다른 만남이 있음을 믿는다. 틴에이저 시절 손 편지에 인용했던 황동규 님의 맑은 시는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다. 외롭고 빈약해도 느낌 있던 청춘의 가을 나는 이 시를 연서처럼 읊고 다녔다.

모든 나무의 선線 그 흔들림이/아직 그대로 남아 있는/이 시월/무사무사의 이 침묵./아침, 거품 물고 도망하는 옆집 개소리./하늘을 들여다보면/무슨 부호처럼/떠나는 새들./자 떠나자/무서운 복수複數로 떼지어 말없이/이 지상의 모든 습지/모든 기억이 캄캄한 곳으로. -황동규 ‘철새’ 중에서

이해균 해움미술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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