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 없고 높은 산 없는 매향리, 미군 폭격훈련 최적지로 점찍어…1년 중 250일 폭탄 쏟아내
24시간 사격 소리에 일상이 고통, 주민은 난폭해지고 자살시도 늘어… 불발탄·오폭에 인명사고도 줄 이어

인근에 민가가 있어 전쟁 상황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는 A급 훈련소 ‘쿠니 사격장’. 1951년부터 2005년까지 54년 동안 불려온 매향리의 또 다른 이름이다. 매향리는 경기도 서해안에 위치한 농어촌 마을이다. 행정구역상 화성시 우정읍에 속해 있다. 이곳 주민들은 굴, 바지락 등 다양한 해산물이 서식하는 넓은 갯벌과 바다, 농지를 통해 생계를 꾸리고 있다. 한가로운 바닷가 마을은 어떻게 A급 훈련소가 됐을까. 평범한 농어촌마을이던 매향리가 미 공군의 A급 훈련소 ‘쿠니 사격장’이 된 까닭이 담긴 정확한 문서는 없다. 매향1리의 옛 이름인 ‘고온리’ 발음이 어려워 쿠니(KOON-NI)라는 이름으로 불렸다는 것만 전해 내려온다.

◇한가로운 바닷가 마을에서 미 공군 사격장으로= 2014년 진행된 윤충로의 연구 ‘전장의 일상화와 고통의 재구성: 매향리 사례를 중심으로’에 따르면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8월 미군이 주민들에게 아무런 통보 없이 마을 앞 해변에서 1.5㎞가량 떨어진 농섬에 폭격을 했다.

또 다른 기록은 마을에서 500m 정도 떨어진 구비섬에 첫 폭격이 시작됐다고 전한다. 난데없이 가해진 폭격에 처음 마을 주민들은 전쟁이 끝나가는 신호인 줄만 알았다. 미 공군이 쓰다가 남은 포탄을 버리고 돌아가는 구나라고만 여겼다.

그러나 휴전이 논의되는 와중에도 포탄은 계속 떨어졌고 1952년에는 지역 논 69만4천214㎡(21만 평)가 미군에게 징발됐다. 이후 1954년 미군이 본격적으로 매향리 해안에 주둔하기 시작했고, 1955년 2월 19일 ‘대한민국과 아메리카합중국 간의 상호방위조약 제4조에 의한 시설과 구역 및 대한민국 내에서의 미합중국 군대의 지위에 관한 협정(한미행정협정·SOFA)’ 제2조에 근거해 폭격훈련장이 공식 설치됐다.

1968년에는 주한미군의 요청에 따라 국방부가 마을 농토 95만8천677㎡(29만 평)를 추가 수용해 육상사격장을 만들면서 ‘쿠니 사격장’이 모습을 갖추게 된다. 1980년 해안 지역 농지를 추가 징발해 2천280만9천917㎡(690만 평)의 해상사격장이 만들어지면서 모두 2천376만8천595㎡(719만 평)의 미 공군 훈련소가 조성된다.

미국 태평양 미공군 사령부 산하 대한민국 주둔 제7 공군이 머무르던 경기도 평택의 오산 공군기지에서 북서쪽으로 40.2㎞ 떨어진 곳에 위치한 매향리는 그렇게 바다와 육지를 더해 2천400만㎡ 규모를 갖춘 아시아 최대 공군 폭격 훈련장이 됐다. 미 공군을 위한 아시아 최대 공군 폭격훈련장이 만들어지는 동안 매향리 주민들은 헐값에 ‘내 땅’을 뺏기고 내 땅을 뺏은 미군에 사용료를 내며 농사를 지어야 하는 하는 ‘소작농’ 신세가 됐다.

주민들의 삶의 터전인 이곳에는 국내 오산(송탄)·대구·군산 공군기지의 조종사뿐만 아니라 해외 일본 오키나와·필리핀 클라크·태국·괌 등 아시아 주둔 미 공군 조종사들이 훈련을 위해 날아왔다.

매향리는 높은 산이 없는 구릉지이면서, 안개 끼는 날이 거의 없는 최적의 환경에다 해상과 지상 표적물이 근접해 동시 운영이 가능한 최적의 훈련장으로 꼽혔다. 매향리로 F-16·A-10·OV-10 등의 폭격기가 주말과 공휴일을 제외하고 1년 365일 중 250일가량을 매일 날아와 700개 가까운 폭탄을 떨어트리고 갔다. 사격훈련장에서는 하루 평균 11시간 이상 약 700회의 사격이 이뤄졌으며, 격주로 진행된 주야간 훈련과 특별 훈련기간에는 24시간 동안 사격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휴전국의 국민인 매향리 주민들은 "또다시 전쟁이 시작되면 싸워서 이겨야 하니 연습은 필요하겠다"는 마음으로 폭격 소음을 버텼다.

◇50여 년 계속된 폭격 소음에 주민들 ‘분노’= 폭격은 54년 동안 이어졌고 그사이 소음과 진동 피해가 극심했던 표적지 인근 10개 마을(매향1·2·3·4·5리, 석촌3·4리, 이화1·2·3리)과 주민은 점점 병들어 갔다. 오발탄과 불발탄에 수많은 주민이 다치거나 목숨을 잃었고 끊임없는 폭격소리에 쌓인 스트레스는 주민들을 분노에 휩싸이게 만들었다.

매향리의 역사·문화, 현대사 백서를 보면 1952년부터 1980년까지 오폭이나 불발탄 등 미군 사격장 사고로 사망한 사람은 8명에 달한다. 1956년 불발탄을 주워 분해하던 4명이 사망했고, 1959년 역시 같은 이유로 1명이 숨졌다. 1961년에는 모래 구덩이에서 고철을 수집하던 주민 1명이 모래더미에 압사 당했고, 이듬해에는 외지인 1명이 오폭으로 목숨을 잃었다.

1967년에는 임신 8개월이던 여성이 어패류 채취 중 오폭으로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미군은 이 여성의 남편을 사격장 경비원으로 채용해 사건을 무마시켰다. 직·간접적으로도 수많은 사람이 부상을 입었다. 바다 조업 중이던 주민이 폭탄 파편에 손목 일부가 절단됐으며, 갯벌에서 굴을 채취하던 12세 소녀의 다리에 폭탄 파편이 박혔다. 불발탄에 화상을 입거나 손가락이 잘리는 일도 있었다.

놀잇감이 부족했던 당시 동네 아이들에게 재미난 장난감이던 불발탄은 때로는 목숨을 뺏기도 했다. 불발탄을 해부하며 놀다 터져 목숨을 잃는 경우도 있었기 때문이다. 표적지 근처 마을 주민들은 유독 암에 잘 걸렸다. 기형아가 태어났으며 유산을 하기도 했다.

매일 시끄러운 소음과 함께 집이 흔들렸고 타 지역에 비해 마을 주민의 자살 시도도 많았다. 폭격 영향은 사람뿐만 아니라 동물에게도 미쳤다. 젖소는 우유를 만들지 못했고, 비싼 값에 팔려야 할 앙고라 토끼의 털은 윤기를 잃었다.

◇삶의 일부가 된 전쟁, 그리고 투쟁의 시작= 주민들의 목숨을 빼앗고 평생 장애를 남기던 포탄은 언젠가부터 마을 사람들의 생계가 됐다. 미군 폭격기가 떨어트린 각종 물건들이 폭격장 인근에 살던 사람들의 생활용품이 되면서다. 물건이 귀하던 시절 미군이 쓰다 버린 군모는 우물의 두레박이 됐고, 폭격 연습 뒤 나온 포탄은 호롱불 받침이 됐다. 조명탄을 쏘아 올리고 난 뒤 떨어지는 알루미늄 탄피는 다리미로 변신했다.

그뿐만 아니라 탄피는 돈이 됐다. 탄피를 주워 고물상에 팔면 생계에 도움이 됐기 때문이다. 한참 농업과 어업을 해야 할 매주 평일 낮시간 사격훈련이 이뤄지면서 먹고 살기 힘들었던 주민들에게 탄피를 줍는 일은 또 다른 직업이 됐다. 동네 사람들은 고철탐지기까지 동원해 탄피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폭탄에 부착된 ‘신주’가 가장 비싼 값에 팔렸다.

1970년대 25㎜전투기 기관포 탄피가 100원, 10㎏에 1천400원 정도 값을 받았다. 한 달 수입이 3만 원가량 됐는데 당시 쌀 한 가마니가 7천 원 정도였던 것을 감안하면 고소득이었던 셈이다. 사람들은 폭격이 멈춤과 동시에 탄피가 떨어진 것으로 예상되는 지점으로 달렸다. 젊은 청년은 많이 줍고 노인이나 여성은 많이 줍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지면서 경쟁이 과열되기도 했다. 주민들은 이 같은 상황을 해결하고자 탄피를 수집해 다 같이 나눠 갖는 방식으로 마을별로 조를 만들고 순번을 정했다.

매향리 주민들의 투쟁은 1988년 시작됐다. 37년 동안 참고 살던 매향리 사람들을 깨운 것은 1987년 6월 일어난 민주항쟁이었다. 민주항쟁 이후 국내 변화의 바람이 불었지만, 시골마을 사람들은 전쟁을 끝내는 데 도움을 준 고마운 나라 ‘미국’을 상대로 싸움하기를 망설였다. 이 같은 마을 주민들을 모아 투쟁을 이끈 사람이 ‘전만규’다. 당시 30대 젊은 청년이었던 전만규(64)씨는 비행기 이착륙 지역 주민들이 자살률이 높고 성격이 포악하다는 기사를 접하면서 소음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됐다. 긴 투쟁은 17년 만에 막을 내렸다. 2005년 쿠니 사격장의 폐쇄가 결정됐다. 이는 미군에게서 세계 최초로 양보를 이끌어낸 투쟁으로 남았다.

◇17년 투쟁 끝에 조용한 삶을 되찾은 매향리 사람들= 54년만에 주민들은 조용한 삶을 되찾았지만, 폭격으로 민둥섬이 된 농섬과 형체가 사라진 구비섬은 돌아오지 못했다. 망가진 환경과 어장도 아직 원래의 모습을 찾지 못하고 있다.

갯벌과 해변에 는 700억 원의 수거비용을 들여 치워야 하는 엄청난 포탄과 잔해가 남았다. 이 잔해물은 기준치의 30여 배가 넘는 중금속으로 바다와 토양을 오염시켰다. 2007년 미군은 자신들이 오염시킨 기지에 대해 오염을 전부 치유했다며 우리 정부에 반환했지만, 이는 사실과 달랐다. 환경오염조사 결과 토양과 지하수에서 납을 비롯한 10여 개의 오염물질이 기준치를 초과한 것으로 나왔다. 오염 관련 문제는 결국 주민들의 몫으로 남았다. 주민들은 폭격장 폐쇄 뒤 10년 동안 포탄을 수거했고 이 포탄들은 매향리 마을 초입에 있는 ‘매향리 평화역사관’ 앞에 쌓여 있다.

이러한 노력으로 2016년 농섬에는 괭이갈매기와 검은머리물떼새 등 멸종위기 종들이 돌아왔다. 어렵게 돌려받은 사격장 터는 어린이들의 꿈이 자라는 유소년 야구장 ‘화성드림파크’와 ‘평화생태공원’으로 탈바꿈한다.

사격 훈련장 터 24만2천689㎡ 에 들어선 ‘화성드림파크’는 리틀야구장 4면과 주니어야구장 3면, 여성야구장 등 모두 8면의 야구장과 주차장·관리동으로 조성돼 2017년 문을 열었다. 국내 최대 규모 유소년 야구장이다. 미군 숙소·식당 등이 있던 터 33만3천578㎡에 만들어지는 ‘평화생태공원’은 습지원, 메타세쿼이아길, 매화숲, 산책로 등을 갖춘 곳으로 올해 조성이 완료될 예정이다.

매향리는 현재 이름에 걸맞은 매화나무 향기가 넘치는 마을이 됐다. 주민들은 10년에 걸쳐 7만 그루의 매화나무를 식재했다. 지난 고통은 ‘매향리 평화역사관’에 남긴 채 조용한 농어촌 마을의 삶을 살아간다.

이금미·양효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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