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그맨, 교수, 작가, 대표…. 불리는 직함만 여러 개다. 방송인이자 수원 행리단길에서 열혈주민으로 활동하는 정재환(59)한글문화연대 공동대표의 이야기다. 정 대표는 사람에 따라 각기 다르게 기억된다. 중장년층에는 유명 방송인, 수원 신풍동 주민들에게는 카페지기이자 우리말 선생님, 대학생들에게는 역사를 가르치는 교수다. 1979년 개그맨으로 데뷔한 정 대표는 오랜 기간 유명 방송인으로 지내왔다. 그는 방송 대본을 외우다 한글의 매력에 빠지고, 역사학을 전공하며 박사학위까지 취득했다. 또 지금까지 여덟 권을 집필한 작가이기도 하다. 지금은 수원 행궁동에 자리를 잡고 있다. 북카페를 열고 우리말 강의도 한다. 자신이 배운 것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며 ‘동네 할아버지 교사’로 남고 싶다는 그. 수원 행궁동 골목길에서 새로운 교육문화를 만들어가고 있는 정 대표를 만나봤다.

-수원 행리단길에 자리를 잡았다
"2019년 수원으로 왔다. 수원은 나와 연이 깊다. 2013년부터 성균관대 자연과학캠퍼스에서 초빙교수를 하고 있다. 경기대에서도 강의를 했다. 수업을 진행하며 수원화성을 자주 답사했다. 화성을 찾으며 수원과 화성의 매력을 느꼈다. 여기서 남은 인생을 마무리해도 좋겠다 싶었다. 그러던 중 마침 나혜석 작가의 생가터에 있는 집이 매물로 나와서 곧바로 계약했다. 현재 1층은 카페로, 2층은 집으로 사용하고 있다. ‘봄뫼’라는 카페다. 봄뫼는 ‘봄’과 ‘산’의 우리말을 따서 만든 나의 호다. 카페를 시작한 이유는 지역사회에 기여하고 싶 어서다. 봄뫼에서는 주민을 대상으로 강연도 하고, 한 달에 한 번씩 북콘서트도 진행한다. 단순히 커피와 음료를 판매하는 일반적인 카페가 아니다. 그럴 목적이었으면 애초에 카페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커피를 마시겠다고 이렇게 좁은 골목까지 올 사람은 없으니까. 하지만 카페에서 열리는 행사에는 다양한 분들이 온다. 나혜석 작가의 생가터인 게 영향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동네에 여성 활동가가 많다. 그림을 그리고 시를 쓰고, 조각하고 도자기도 만드는 다양한 예술가들이 카페를 찾는다. 행리단길에서 장사를 하는 상인들도 자주 찾는다. 수원은 나의 새로운 고향이 됐다. 화성이라는 엄청난 문화유산이 있고 정겨운 주민들도 옆에 있다. 이제는 수원 신풍동 주민으로서 수원을 알리는 역할을 할 계획이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나
"방송일을 하면서 역사 공부를 했다. 현재는 교수가 돼서 강의도 하고 책도 쓰고 있다. 2000년에 ‘한글문화연대’라는 단체에 몸을 담았다. 현재는 공동대표를 맡고 있다. 우리말을 알리고 바른 말 사용하기 운동을 하는 단체다. 1997년쯤 영어를 공용어로 지정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국제사회에서 영어가 가진 위상을 고려할 때 영어를 국가 차원에서 배워야 한다는 것이었다. 영어의 중요성에는 공감하지만 한글 대신 영어를 집중해서 배워야 한다는 의견에는 동의할 수 없었다. 그런 사람들이 모여 한글문화연대를 만들었다. 한글문화연대는 과거 정권에서 추진했던 영어몰입교육에도 반대했다. 모든 교육을 영어로 하자는 것인데, 당위성도 따져봐야 하지만 현실적으로도 불가능하다. 한글날(10월 9일)을 공휴일로 지정하자는 운동도 했다. 최근에는 공공언어 감시활동도 한다. 일상에서 남용하는 외래어를 줄이자는 것이다. ‘노인쉼터’를 ‘노인쉘터(Shelter)’로 부르거나 ‘승차진료’를 굳이 ‘드라이브 스루(Drive-through)’라고 부르는 것들이다. 늦깎이 대학생 생활도 했다. 2000년에 성균관대 사학과에 입학했다. 평소 역사에 관심이 많았다. 졸업 후 곧바로 석사 공부를 했다. 2005년 당시 ‘SBS 도전! 1000곡’을 진행하면서 공부를 병행했다. 하지만 박사 과정을 시작하면서는 상황이 달라졌다. 공부량이 많아지고 방송도 챙겨야 하다 보니 도저히 시간이 나지 않았다. 방송과 공부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시기였다. 당시 공부를 하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과정은 힘들지만 몰랐던 내용을 알게 될 때마다 희열이 있었다. 덕분에 어렵사리 박사학위까지 취득했다. 현재는 성균관대에서 학생들에게 역사를 가르치고 있다. 또 수원 화성 골목에서 아내와 함께 카페를 하고 있다."

-우리말에 대해 애정이 상당한 것 같다
"방송을 하면서 우리말의 중요성을 느꼈다. 한때 라디오 DJ를 했다. 방송은 대부분 대본대로 진행된다. 하지만 청취자와 전화 연결을 하거나 초대손님과 대화하는 부분에서는 대본 없이 해야 할 때도 있다. 문제는 대본에 없는 말을 하는 게 쉽지 않다는 것이다. 말을 할 때마다 바른 말을 사용하고 있는지, 어떤 말을 하고 어떤 단어를 써야 하는지 고민이 됐다. 국어 실력이 부족하다고 느끼고 그때부터 공부를 시작했다. 공부를 하면서 우리말 관련 책도 쓰게 됐다. 국어학자들이 쓴 책을 보면서 공부했는데 일반 독자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았다. 누구나 쉽게 우리말을 배울 수 있는 책이 있으면 좋겠다 싶었다. ‘자장면이 맞아요 잠봉은’이란 책도 그렇게 만들어졌다. 당시 ‘자장면’이라는 표준어가 널리 알려지지 않은 시기였다. 방송일을 하면서 일어난 사례들을 중심으로 책을 엮었다. 책을 낸 이후 때마침 방송계에서도 표준어를 지켜야 한다는 바람이 불며 자장면으로 표기하기 시작했다. 우리말을 제대로 배운다는 건 매우 중요하다. 말에 따라 사람의 생각이 좌우되고 행동도 달라진다. 그럼에도 우리는 한글 공부에 소홀하다. 영어를 정확하게 사용하기 위해 두꺼운 영문책을 보지만, 매일 사용하는 한국어는 제대로 공부하지 않는다. 한글날마다 세종대왕을 존경한다고 하고 외국에 나가서 한글이 최고라고 말해도 소용없다. 제대로 공부하고 바른 말을 사용해야 한다. 최근 ‘아리아리’ 알리기 운동을 하고 있다. 아리아리는 ‘길을 가자. 길이 없으면 만들어서라도 가자’라는 뜻이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파이팅(Fighting)’이라는 뜻과 같다고 보면 된다. 최근 국립국어원이 파이팅을 표준어로 지정했다는 보도를 봤다. 잘못된 결정이라고 본다. 대중들이 많이 사용하는 말이라고 하더라도 잘못된 외래어를 표준어로 지정해선 안 된다. 일본에서도 ‘화이토(fight의 일본식 발음)’라는 말을 쓰지만, 일본 정치인과 기업인 등 대부분은 ‘간바레(힘내라)’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일반 시민들도 마찬가지다. 우리도 파이팅 대신 아리아리라는 표현을 널리 써야 한다."

-한글문화연대 공동대표, 작가, 교수 등 하는 일이 많다
"가장 최근에는 ‘칠곡할매 글꼴’ 홍보대사로 활동하고 있다. 칠곡할매 글꼴은 경북 칠곡에 계신 할머니들의 손글씨를 따서 만든 글꼴이다. 유명인이 아닌 할머니들이 글꼴을 만든 것도 이례적이지만, 칠곡할매 글꼴을 만든 할머니들이 이제 막 글을 깨우친 분들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한글을 배우기 전까지 할머니들은 한글을 읽을 줄 몰라 버스도 제대로 타지 못했다. 그 정도로 활자와는 거리가 먼 분들이었는데 글을 배우며 글씨체까지 만들었다. 글씨 연습을 하는 데 종이 2천 장이 들었다고 한다. 할머니들이 쓴 삐뚤빼뚤한 글씨를 보니 돌아가신 어머니의 손글씨가 생각났다. 누구나 사용할 수 있게 무료로 배포한다고 하니 많은 분들이 이용해주셨으면 한다. 2016년부터 ‘한국어 학교’도 운영하고 있다. 이주여성에게 우리말을 가르치는 학교다. 생활비까지 지원하진 못 하지만 우리말이 서툰 외국인에게 한글을 가르치고 있다. 베트남과 필리핀분도 있고 최근엔 일본과 중국분이 많다. ‘평양여행학교’의 교장도 맡고 있다. 현재 남북 관계가 어려운 상태다. 하지만 여행은 정치문제로부터 자유롭다. 우리나라 국민들에게 백두산과 평양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컸다. 학교에서 북한의 역사와 유적, 관광명소 등을 소개하는 강의를 하고 있다."

-다양한 일을 할 수 있는 원동력은 무엇인가
"재미에서 나온다. 19살에 개그맨으로 데뷔했다. 밤새 아이디어 회의를 했다. 몸이 힘들었지만 버틸 수 있었던 건 과정이 즐거웠기 때문이다. 공부도 마찬가지다. 수백 장의 자료를 찾고 연구하는 과정은 매우 힘들다. 하지만 몰랐던 사실 알게 되는 재미, 새로운 내용을 발견하는 재미를 느끼다 보면 공부를 할 수 있는 힘이 생긴다. 박사과정을 하면서도 마찬가지였다. 주시경 선생의 두 제자가 우리말을 알리기 위해 남과 북으로 각각 흩어졌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우리말을 알리기 위해 남과 북을 선택했다는 것도 흥미롭지만, 당시에는 얼마든지 통일이 이뤄질 것이라고 여겼다는 사료도 있다. 결국 통일은 언제든 올 테니 우리말을 우선 갖춰야 한다는 신념 아래 두 명의 언어학자들이 서로 반대편에 선 것이다. 나는 운이 좋았다. 보통 사람들은 하기 싫은 것도 감수하면서 산다. 하지만 방송이든 공부든 지금껏 하고 싶은 걸 해왔다. 실제로 마음에 들지 않는 방송 프로그램을 먼저 그만두겠다고 한 적도 있다. 그런데 지금은 배운 것을 누군가에게 알려주는 게 즐겁다. ‘살며 사랑하며 배우며’라는 책을 좋아한다. 제목부터 내용까지 마음에 든다. 배우는 건 자신을 위하는 것이지만, 사랑한다는 것은 남을 위하는 것이다. 누군가에게 교육을 한다는 게 사랑이 아닌가 싶다."

-앞으로 목표는 무엇인가
"이곳에서 계속 지내면서 우리말을 가르치고 역사도 알려주는 할아버지가 되고 싶다. 배운 것을 나누는 게 즐겁다.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무상으로 운영하는 교육공간을 만들고 싶다. 동네 주민과 아이들에게, 할머니·할아버지들까지 내가 배운 한글과 역사를 알려드리려고 한다. 나는 경제개념이 부족한 편이다. 그래서 돈을 좇기보다는 하고 싶은 걸 하면서 살아왔다. 돈을 목표로 했으면 지금도 방송가에 있을 것이다. 대학교에서 공부도 하지 않았을 것이고 수원에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돈은 먹고 살 수 있는 정도만 있으면 된다. 보다 중요한 건 내가 남은 인생을 즐겁게 살 수 있느냐다. 지금처럼 이곳에서 카페를 운영하면서 지역민들을 만나고 싶다. 서로 지식을 나누고, 지역공동체를 강화하며 교육공간도 마련하고 싶다. 이곳은 새로운 시작이자 앞으로 열려있는 나의 미래다."
취재=정성욱기자/
사진=김영운기자/
영상=김도윤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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