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피로 만든 양동이’, ‘포탄으로 만든 등잔’, ‘낙하산으로 만든 옷’.

54년 동안 미 공군 사격장으로 이용된 매향리 사람들에게 전쟁 도구는 생활용품이 됐다. 목숨을 빼앗고 장애를 남긴 수천, 수만 개의 탄피는 각각 다른 모습으로 일상에 녹아들었다.

야간 사격 훈련을 위해 발사한 조명탄 탄피는 양동이와 다리미가 됐고, 조명탄을 달고 날아다니던 낙하산은 옷과 포대기로 탈바꿈했다. 당시 주된 옷감은 촉감이 까칠한 데다 보온력도 좋지 않은 광목천이었다.

이들에게 부드럽고 따듯한 나일론으로 된 낙하산은 최고의 옷감이 됐다. 미끄럽다는 단점도 있었지만, 가위로 잘라 바느질을 하면 광목천으로 만든 옷보다 훨씬 더 좋은 옷이 탄생했다.

알루미늄으로 만들어진 조명탄 껍질은 튼튼한 생활용품을 만드는 데 적격이었다.

농섬 주변에 널브러져 있던 조명탄 탄피를 주워 물통, 양동이, 지게 받침 등을 만들었다.

포탄으로 만든 등잔. 오발탄 사고가 특이 많았던 포탄이라는 게 매향리 사람들의 전언이다. 양효원기자
포탄으로 만든 등잔. 오발탄 사고가 특이 많았던 포탄이라는 게 매향리 사람들의 전언이다. 양효원기자

미군이 쓰다 버린 군모로 우물물을 퍼 올리는 두레박을 만들기도 했다.

탄피가 생활용품이 되면서 불발탄이나 조명탄을 여러 가지 물건으로 만들어주는 ‘제작자’도 생겨났다. 손재주가 좋던 누군가는 사람들이 주워 가져온 탄피를 반듯하게 펴고 자르고 붙여 생활용품을 만들었다. 이들은 물건을 만드는 대가로 약간의 돈을 받아 생계를 이어가는 데 보탰다.

작은 마을 하나를 통째로 날려버릴 수 있는 파괴력을 지닌 포탄은 마을에 위급상황이 닥쳤음을 알리는 종이 됐다. 마을에 가장 큰 위협을 주던 물건이 최종적으로는 마을에 위험을 경고하는 도구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전기가 없던 1960년대 야간 사격을 위해 농섬에 설치된 25개의 등잔은 때때로 마을 초상집 마당을 밝히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사람들은 초상이 나면 농섬에 들어가 밝게 빛나는 등잔을 가져다 마당에 설치했다.

물자가 귀한 시절 하늘에서 떨어지는 탄피는 백 개의 고통을 내어주고 돌려받은 단 한 개의 보상이었던 셈이다. 매향리 사람들은 끝나지 않는 지독한 전쟁 훈련에 나름대로 적응하며 삶을 이어 왔다. 폭격과 소음 속에서 다양한 생존 방법을 찾았고, 매일매일 마을을 흔드는 폭격과 소음은 어느새 자연스러운 일상이 됐다.

누군가는 평생을 살면서 만져볼 일조차 없을 포탄과 총알, 그리고 낙하산이 생활의 일부였던, 사격장이 떠난 지금은 그때 그 모습이 ‘웃픈’ 기억으로 남아있다는 전순화(65·여)·이주희(58·여)씨를 만났다.
 

전순화씨.
전순화씨.

◇비단 같던 낙하산 옷과 아버지의 눈물로 얼룩진 유년시절 전순화 씨

 "우리 언니가 낙하산으로 만든 포대기로 막내 동생을 업고 다녔는데, 글쎄 어느 날은 이 포대기가 미끄러우니까 애가 바닥으로 뚝 떨어진거야. 기절하는 줄 알았다니까."

화성시 우정읍 매향1리에 살고 있는 전순화씨가 아이가 빠지던 상황을 설명하면서 웃었다.

전씨는 "지금은 웃으면서 이야기 하지. 그때는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 우리 언니는 아직도 막내만 보면 잘못될까봐 노심초사한 얘기를 한다니까"라고 돌이켰다.

대청마루로 올라가던 순간 미끄러운 낙하산 포대기에서 쑥 빠져 바닥으로 떨어졌던 막내는 어느새 예순을 바라보는 나이가 됐다.

"어릴 때 낙하산이 둥둥 뜨면 언제 떨어지나 기다렸다가 동네 오빠들을 따라서 막 뛰었어. 낙하산을 주워서 집에 들고가면 우리 할머니랑 어머니가 우비도 만들어 주고 옷도 지어줬지."

뭣도 모르고 낙하산 줍던 어린시절

볏단 안고 울부짖던 아버지 못잊어

야간 사격 훈련이 이뤄지던 날에는 하늘에 20~30개의 낙하산이 떴다. 어두운 밤 농섬에 설치된 표적을 보고 맞출 수 있도록 낙하산에 조명탄을 달아 날렸기 때문이다. 하늘을 떠 다니다 내려온 낙하산은 가위질과 바느질 몇 번에 다른 모습으로 부활했다. 지금같이 옷감이 다양하지 않았던 그때 나일론 낙하산은 비단과 다름없었다.

"어릴 때는 뭣도 모르고 낙하산 줍는다고 이리 뛰고 저리 뛰어다니느라 정신 없었지. 조금 커서는 낙하산이 뜨면 폭격한다는 의미니까 싫었어.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막 웃다가 슬프다가 그래."

전씨의 집은 매향리에 꽤 많은 땅을 가진 부잣집이었다. 아버지가 염전과 논, 바다에서 단 하루도 편히 쉬지 않고 일한 결과였다. 그렇게 일군 땅에 미 공군 사격 훈련을 위한 표적 세워졌다. 아버지가 손발이 닳도록 가꾼 땅에 자라난 벼는 웅덩이로 힘없이 쓸려 들어갔다.

"어느 날 아버지가 너무 안 오시는 거야. 그래서 마중을 나갔는데 글쎄 아버지가 볏단을 끌어안고 막 울면서 소리치고 있더라고. 하지 마라고. 그만하라고."

전씨의 목소리가 어두워졌다. 그는 아직도 그때 생각만 하면 눈물이 차오른다.

전씨는 "농사 짓는 일이 보통이 아니야. 얼마나 애를 써야 하는데. 그렇게 애써 키우고 추수해서 이제 집으로 가져오기만 하면 되는 걸…, 굴삭기를 끌고 와서 논에 물을 대려고 파 놓은 웅덩이에 다 쓸어 넣은거야"라고 설명했다.

그날 논에 있던 볏단은 미 공군 사격장 조성에 땅을 헐값에 뺏긴 아버지가 농사 지은 벼라도 지키고자 밤 늦은 시간까지 일일이 손으로 베어낸 것이었다.

이틀 뒤면 집으로 가져와 가족의 배를 채우고, 1년을 먹고살 돈이 될 볏단이었다.

그는 "더 무서웠던 건, 아버지가 볏단을 지키고 있는데 그냥 막 밀어붙이는 거야. 볏단이랑 아버지를 같이 밀어 버릴 기세더라고. 아버지가 잘못될까봐 얼마나 발을 동동거렸는지 몰라. 아직도 그때 꿈을 꿔"라고 말하며 눈물을 훔쳤다.

피와 땀으로 키운 작물과 땅을 잃은 아버지는 병이 들었다.

"말도 안되는 값에 땅을 뺏기고 하루 아침에 거지가 됐지. 아버지는 화병이 나니까 매일 술만 드시고…."

그나마 몇 십, 몇 백 원이라도 땅값을 받으면 다행이었다. 마을 주민들 사이 이뤄진 땅 거래는 등기를 안 낸 경우가 허다했다. 등기가 없는 땅은 땡전 한 푼 받지 못한 채 속수무책으로 뺏겨야 했다. 전씨의 아버지 역시 가진 땅의 절반 이상을 보상받지 못했다. 전씨는 사격장이 떠난 뒤 아픔은 묻고, 새로운 희망을 품었다.

"지난 일은 지난 일로 묻고 앞으로를 살아야지. 지금 이 조용한 평화, 제발 이 평화만 안 깨졌으면 좋겠어. 나는 그럼 평생 바랄 게 없어."
 

이주희씨.
이주희씨.

◇임신 6개월때 오발탄 본 후 폭격후유증 시달리는 이주희씨

"나는 지금도 가끔 자다가 자지러지게 놀라면서 깨. 낭떠러지에서 떨어지는 느낌이 들어서. 폭격후유증인 것 같아."

화성시 우정읍 매향3리에 거주하는 이주희씨는 아직도 마을에 포탄이 쿵쿵 박히던 시절을 생각하면 온몸이 떨린다. 매향리에서 나고 자란 그는 23살이 되던 1986년 마을을 잠시 떠났다. 남편 직장 문제였지만, 소음에서 해방되는 기회기도 했다.

이씨는 "사격장 안 떠났으면 다시 안 돌아왔지. 우리 애들은 소음을 모르고 컸거든. 애들한테 매일 우르르 쾅쾅 소리 들려주고 싶지 않으니까…"라며 "나 어릴 때 생각해보면 우리 애들은 그런 고통 안 받았으면 했지. 때마침 남편 직장 덕에 나가서 다행이었어"라고 말했다.

그는 사격장이 떠난 뒤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앞으로의 시간은 조용한 고향에 보내고 싶은 마음이 컸기 때문이다.

"글쎄, 사격장이 만약 안 떠났으면 고향에 안 왔을 것 같아. 그 공포를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몰라. 얼마나 끔찍한지…."

이씨는 다른 누구보다 폭격의 공포가 더 크다. 집 바로 뒤에 있는 돼지우리에 오발탄이 떨어진 적이 있어서다.

낙하산 떨어지는 날=옷 생기는 날

공포와 바꾼 살림살이 '웃픈기억

"임신 6개월 때인가. 잠깐 볼일이 있어서 나갔다 왔는데 우리집 앞에 동네 아주머니들이 모여서 웅성웅성하는 거야. 이게 무슨 일인가 해서 뛰어갔더니 집 뒤에 팔뚝보다 큰 포탄이 박혀 있더라고."

그는 그때만 생각하면 소름이 돋는다. 만약 포탄이 떨어질 때 집에 있었다면 큰 충격에 유산이 됐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집이 마치 누가 잡아서 흔드는 것처럼 사정없이 흔들렸데. 집 안에 어린 동생들이 있었거든, 동생 걱정에 순간 심장이 쿵 내려앉는 것 같았다니까."

당시 겪은 공포로 이씨는 아직도 악몽을 꾼다. 꿈 속에서 그는 포탄과 총알이 날아다니는 전쟁터에 있다. 그러다 포탄이 쿵 하고 떨어지면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벌떡 일어난다고.

이씨는 "어릴 때부터 자다가 경기를 일으키거나 놀라서 깨는 일이 잦았어. 펑펑 터지는 소리에 매일 놀라면서 살았으니까…, 잠도 잘 못 자고 마음에 병이 생긴 거지"라며 "집에 아무도 없어서 혼자인 날에는 너무 무서워서 다락에 올라가서 숨어있었어. 매일매일이 공포 그 자체였던 거지"라고 돌이켰다.

이어 "우리 집에 소를 두 마리 사온 적이 있는데 동물이라도 소음 스트레스는 사람이랑 똑같이 받는지 새끼를 계속 유산했어"라고 회상했다.

전투기가 하강했다 상승하면서 포탄을 쏘는 곳과 가까웠던 이씨 집 지붕에는 조명탄을 매달고 날아다니던 낙하산이 유난히 자주 내려앉았다. 이씨와 동생들이 지붕에 널브러진 낙하산을 끌어내려 집 안으로 들고가면 할머니와 어머니가 바빠졌다. 낙하산은 할머니와 어머니의 손길에 속옷과 겉옷은 물론, 곡식을 담는 자루, 모기장, 이불 등으로 변신했다.

그는 "낙하산을 하나 주워오면 그게 엄청 커. 옷도 되고 이불도 되고 살림살이가 되는 거지"라며 "그때는 막 다 돈도 없어서 가난하고 물건도 귀할 때니까 낙하산이고 탄피고 주워다가 쓸 수 있는 대로 만들어서 쓴 거야"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까끌까끌한 옷만 입다가 낙하산으로 만든 옷을 입으면 얼마나 보드랍고 좋은지 몰라"라며 "맨날 천둥번개 치는 동네에서 유일하게 좋았던 순간이랄까…, 아이러니하지. 꼴도 보기 싫은 것들이 순간 좋아진다는 게"라고 말하며 웃었다.

"우리 애들도 다 잘 커서 나가 있고, 고향도 예전 같은 조용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되찾았는데 더 바라면 욕심이지. 지난 50여 년의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지만, 앞으로 계속 지금만 같았으면 좋겠어."

이금미·양효원기자
사진=김영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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