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청 출입 기자였던 손병관 오마이뉴스 기자가 최근 출간한 [비극의 탄생: 50인의 증언으로 새롭게 밝히는 박원순 사건의 진상]이란 책을 읽었다. 언론인권센터는 이 책이 "2차 가해의 집약체"라고 비판한 바 있다. 왜 이런 책을 썼을까? 그는 "혹자는 이 책이 어느 한 사람의 아픔을 건드린다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그 사람에게는 오직 한 사람의 피해자가 보였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취재 과정에서 무수한 피해자들의 사연을 접했다"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들은 가장의 죽음으로 황망한 처지에 놓인 유족일 수도, 어느 순간 천인공노할 범죄를 묵인·방조·은폐한 공범으로 몰린 공무원들일 수도 있다. 그들 중 어느 한쪽의 목소리가 더 크다고 해서 그의 고통이 더 크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결국 이들 모두의 ‘신원(한을 풀어줌)’을 위해서는 내가 알아낸 진상을 있는 그대로 내보이는 것이 내 본분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성추행과 관련해 도움을 청한 서울시 공무원이 20명이었다는 피해자측의 발언으로 인해, 30여명이 경찰 조사를 받았다. 이들 사이에서 "내가 왜 이런 대우를 받아야 하나", "피해자가 해도 너무 한다"는 비판론이 부상했다고 한다. 피해자를 지지하는 쪽이었던 한 공무원은 "경찰을 매개체로 말이 오가면서 양쪽 모두 전면전으로 갈 수밖에 없게 됐다"고 말한다. 이 사건으로 인해 졸지에 일자리를 잃은 별정직 공무원 27명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이런 갈등 상황에서 기자에게 가장 필요한 덕목은 ‘거리 두기’이겠건만, 손 기자는 그걸 포기하고 오히려 자신이 새롭게 규정한 피해자들에 대한 ‘감정이입’의 수준으로까지 나아간다. ‘천인공노할 범죄를 묵인·방조·은폐한 공범’이라는 과장법은 공무원들의 억울함이 크다는 걸 말하기 위해 동원한 것이겠지만, 그런 억울함의 고통이 죽음까지 생각한 피해자의 고통보다 작지 않을 수 있다는 그의 생각엔 결코 동의할 수 없다.

문제의 핵심은 ‘잘못된 의전 문화’다. 그런 점에선 기존 조직 질서에 순응할 수밖에 없는 공무원들도 피해자로 볼 수 있겠다. 이렇게 넓게 보면 일부 공무원들이 느꼈을 억울함도 해소하면서 "기존 의전문화를 혁명적으로 바꾸자"는 개혁적인 저널리즘 의제가 도출될 수 있다. 그러나 손 기자는 그런 ‘복잡성’을 포기한 채 선명하고 단순한 이분법 논지를 향해 달려간다. 그간 알려진 피해자와 가해자의 위치를 뒤집어 보겠다는 야망의 의지가 책 곳곳에서 드러난다.

이 책은 피해자가 기존 의전문화에 잘 적응해 유능하다는 평가를 받은 인물이었다는 점을 반복적으로 강조한다. 다른 해석의 여지가 충분한 피해자의 어떤 행위에 대해서도 "피해자에게는 매우 치명적이었다"는 식으로 단언하는 방식을 취한다. 심지어 이미 ‘2차 가해’로 큰 논란을 빚었던, 피해자가 박 전 시장에게 보낸 사적인 편지의 전문을 다시 게재하면서 피해자의 고소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공무원들의 증언은 대부분 이를 뒷받침하는 데에 활용되고 있다.

공무원들은 손 기자가 ‘믿을 만한 기자’라는 신뢰를 근거로 인터뷰에 응했는데, 바로 이 신뢰가 문제였을까? 아니면 손 기자가 미리 내리고 들어간 결론에 따른 ‘확증 편향’이 문제였을까? 내가 가장 의아했던 건, 기자로서 당연히 반론 질문을 해야 할 증언이 자주 나오는데도 손 기자는 그렇게 하질 않고 그 증언을 보강하는 다른 증언이나 해설에만 주력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심지어 ‘냄새 좋아 킁킁’이란 심야의 메시지마저 아무 문제 없는 친근한 표현이라는 식으로 넘어가는 데엔 어이가 없어진다.

2020년 4월 유튜브 채널 ‘열린공감TV’에 ‘단독! 고(故) 박원순 시장 고소인 영상 공개!’라는 제목으로 박 전 시장과 한 여성이 나란히 서서 같이 케이크를 자르는 모습을 담은 영상이 올라왔다. 악의적인 편집과 더불어 "누가 누구를 성추행하는 것인가, 저 모습이 4년 동안 성적 괴롭힘을 당한 사람이라고 볼 수 있나"는 자막을 곁들여서 말이다. 수천개의 댓글 대부분이 피해자에 대한 공격이었다. 한겨레가 <피해자에게 ‘피해자다움’을 추궁하는 악의적인 2차 가해>라는 제목의 사설을 통해 비판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손 기자는 "동영상에 붙은 일부 자막을 보며 좀 더 차분한 톤으로 전달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며, 한겨레 사설을 이렇게 비판한다. "피해 실체를 확인하려는 시도 자체에 ‘2차 가해’나 ‘피해자다움 강요’라는 프레임을 씌운다면 언론의 역할은 뭐가 남을까? 한쪽 얘기는 듣지 않고 목소리 큰 또 한쪽의 얘기만 전하는 것은 저널리즘이 아니라 프로퍼갠더라고 나는 배웠다."

프로퍼갠더라니, 놀라운 말씀이다. 지금은 소셜 미디어의 시대가 아닌가. 소셜 미디어를 통해 이루어진 폭포수 같은 ‘2차 가해’엔 단 한마디도 하지 않으면서 목소리가 약해질대로 약해진 언론 탓을 하다니, 이래도 되나? 그는 모든 언론 보도를 프로퍼갠더로 보는 것 같다. 그래서 자신의 기사에 제동을 건 오마이뉴스 편집국장과도 갈등을 벌였을 것이다. 편집국장은 "보다 거리를 두고 사안을 보는 사람들 입장에서도 생각해야 한다"거나 "너무 미시적인 것 같다"는 반론을 제기했다고 한다. 나는 이 견해에 동의한다.

내가 보기에 손 기자는 ‘터널 시야(tunnel vision)’에 빠졌다. 이는 터널 속으로 들어갔을 때 터널 안만 보이고 터널 밖은 보이지 않는 것처럼 주변을 보지 못한 채 시야가 극도로 좁아지는 현상을 뜻한다. 한가지 주제를 깊게 파고 드는 연구자들에게 자주 나타나는 현상이다. ‘터널 시야’가 꼭 나쁜 건 아니다. 자신의 연구 주제에 대해 큰 업적을 이룰 수 있으며, 집중을 위해 불가피한 면도 있다. 문제는 이게 인간세계의 갈등을 다룰 때엔 독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가해-피해의 쌍방 관계에서 가해자로 지목된 사람에 대한 이해, 공감, 신원은 사실에 근거했을 땐 아름다울 수 있지만, 이런 작업이 균형을 잃고 어느 한쪽의 언행만 선의로 해석하는 ‘선택적 저널리즘’이 된다면 그건 결코 아름다울 수 없다. 진실에 근접하기보다는 오히려 진실로부터 멀어지게 만드는 저널리즘의 비극이 될 수 있다. 나는 이 책을 ‘저널리즘의 비극’이라고 부르련다.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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