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반도체 대란이 심상찮다. 코로나로 인한 IT 기기 수요 급증과 디지털 전환 흐름이 가속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뜻하지 않은 각종 자연재해와 미·중 갈등에 따른 불확실성까지 겹치면서 공급 부족 현상이 심화하고 있다. 다행히 반도체가 주력산업인 우리로선 유례없는 호황을 맞게 됐다. 삼성과 SK는 주문이 밀려들면서 사상 최대 영업이익을 갈아치웠다. 또 반도체 슈퍼 사이클에 힘입어 향후 얼마간 호황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좋아할 수만은 없는 상황이다. 반도체 대란을 겪은 세계 각국이 ‘반도체 자립론’을 고민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경제패권을 둘러싸고 미국과 중국의 대결이 격화되면서 우리 자리는 불안하기만 하다. 위험과 기회가 공존하는 것이다.

과거에도 비슷한 사례가 있었다. 일본의 경우다. 일본기업은 1980년대까지 세계 반도체 시장을 주름잡았다. 당시 일본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아래 D램 반도체를 앞세워 세계시장을 휩쓸었다. 시장 점유율은 전체의 절반을 넘었고, 세계 10대 반도체 회사 중 6곳을 일본기업이 차지했다. 한마디로 반도체 일본 천하였다. 그 위력은 자연스레 경제 패권국 미국을 직격했고, 미국 언론과 정계에서 ‘제2의 진주만 습격’이라 부를 만큼 파급력은 압도적이었다. 더이상 두고 볼 수 없다는 판단에 이른 미국은 행동을 개시했다. 일명 ‘슈퍼 301조’로 불리는 강력한 통상법과 덤핑제소, 직권조사 등을 지속적으로 퍼부었다. 견디다 못한 일본 정부는 항복선언을 했다. 미·일반도체협정에 따라 일본 내 미국산 반도체 점유율을 기존보다 두 배로 높이고 반도체 저가 수출도 중단했다. 또 미국의 대일본 반도체 직접투자 금지도 철폐했다. 이후에도 미국은 지속적으로 일본의 협정 준수를 요구하며 보복관세 부과압박과 일본 반도체산업 감시 등을 이어갔다. 결국 일본 반도체산업은 회생불능 상태로 무너졌다. 특히 한 덩어리로 연결되어 있던 전자기업들까지 타격을 받으면서 일본 전자산업 전체의 동반 추락으로 이어졌다. 오늘날 한국과 대만이 신흥 반도체 강국으로 올라서게 된 단초이기도 하다.

지난달 미국 정부가 백악관으로 삼성전자를 초청했다. 미국 내 반도체 투자 확대를 요청하기 위해서였다. 미국 정부는 삼성에 5나노 이하 첨단 반도체공장의 자국 내 증설을 서둘러 달라고 요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 공장 증설시 각종 인센티브 등도 약속한 것으로 전해졌다. 주목할 점은 미국 국가안보보좌관이 반도체 업계 회의에 모습을 드러냈다는 점이다. 전문가들은 삼성이 중국의 홍색 공급망에서 이탈해 미국 경제동맹에 합류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던진 것으로 풀이했다. 즉, 미국 내 투자 확대 뿐 아니라 주요 미래 산업에서 미국과 중국 사이 양자택일을 압박한 것이다. 삼성으로선 난감한 처지일 수밖에 없다. 당장 삼성반도체의 대중국 수출 비중이 미국보다 높다. 또 중국 시안에는 해외 유일의 메모리 공장이 있고 주요 고객사들도 중국 스마트폰 업체들이다. 더욱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첨단산업 굴기를 내걸고 ‘중국 제조 2025’에 속도를 내며 반도체 자급률을 높이겠다고 선언한 상황이다. 어떤 식으로든 우리 정부의 정책적 결단과 지원이 필요한 시점인 것이다.

부랴부랴 사태를 파악한 여당은 반도체 특위를 만들고 8월까지 획기적인 대책을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말만큼 묘책이 쉬울 리 없다. 미국과 중국이 사실상 세계시장을 주도하고 있는 만큼 우리로선 어느 한쪽도 포기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어쭙잖은 대응으로 줄타기를 하다간 양쪽에서 다 공격당하는 처지에 놓일 수도 있다. 기술력이 우선이지만 상황판단과 대처능력이 중요한 이유다. 이제 반도체가 기술과 민간의 영역에서 국제관계와 미래산업의 영역까지 확대된 만큼 정치권과 기업이 머리를 맞대야 한다. 그래서 앞으로 펼쳐질 다양한 상황을 시뮬레이션하고 최적의 안을 도출해야 한다. 자칫 자만하거나 잘못된 선택을 하는 순간 일본 반도체의 전철을 밟을 수 있다는 걸 잊어선 안된다.

민병수/디지털뉴스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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