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에서 돈이 떨어지는 마을’. 50여 년 동안 미 공군 사격장을 품고 살아온 화성시 우정읍 매향리 사람들은 어느 날부터 ‘하늘’만 바라보고 살게 됐다. ‘돈’이 되는 탄피가 언제, 어디로 떨어지는지 확인하기 위해서다. 폭격으로 바다에 들어가 해산물을 채취하는 일은 물론, 농사까지 제대로 짓지 못하게 되면서 사람들은 생계를 고민해야 했다. 먹고살 길이 막막해진 마을 사람들 눈에 금속으로 된 ‘탄피’가 들어왔다. 탄피를 모아 녹여 팔면 비싼 값을 받을 수 있었다.

25㎜전투기 기관포 탄피는 한 개(370g)에 100원, 10㎏에 1천400원의 가치가 있었다. 목숨을 걸고 탄피를 주우면 한 달에 3만 원가량 수입을 얻었다. 매향리 사람들은 폭격이 멈추는 빨간 깃발이 내려감과 동시에 탄피가 떨어진 곳으로 달렸다. 신체가 건강한 청년들은 빠르게 많은 탄피를 주웠고, 노인이나 여성은 그렇지 못했다. 온 마을 사람들이 전투기 포탄과 총알이 떨어지는 하늘만 보고 살았고, 탄피 줍기 경쟁은 점점 과열됐다. 과열된 경쟁은 부상자와 사망자를 만들었다. 빠르게 뛰어야 더 비싼 탄피를 주울 수 있던 탓에 사람들은 포탄이 떨어지는 농섬 안에 몰래 들어가 기다렸다. 전투기가 표적에 포탄을 떨어트리면 바로 달려가 주울 요량으로 나선 것이다.

사격장 철망에 구멍을 뚫고 들어가는 위험을 감수하기도 했다. 불발탄을 터트리거나 분해하는 작업도 이뤄졌다. 살기 위해 시작한 탄피 줍기가 결국 이웃 또는 가족의 목숨을 뺏은 것이다. 주민들은 ‘다 같이 수집해 다 같이 나눠 갖자’고 했다. 마을별로 순번에 맞춰 탄피를 줍는 조를 만들었다. 매향리 농부와 어부들은 그렇게 본래의 직업을 잃고 ‘탄피 캐처’가 됐다. 목숨을 걸고 탄피를 주워 팔아야만 먹고살 수 있는 이상한 마을에 이상한 직업이 생긴 셈이다. 누군가를 죽이기 위해 쏘아 대는 탄피가 마을 사람들에게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돈’이 됐다.

마을 사람들이 하늘만 바라보고 살던 그때 탄피를 중개하고, 녹여 팔던 박순자(74·여)·윤석근(76)씨를 만났다.

 

고물취급업자에 탄피 중개하던 '매향슈퍼' 주인 박순자씨

"마을 사람들이 사격 안 할 때 나가서 탄피를 잔뜩 주워오면 내가 고물취급업자한테 넘겼어. 그때 당시 한 80원 받았나."

화성시 우정읍 매향리 초입에 들어서면 만날 수 있는 ‘매향슈퍼’는 1973년 문을 열었다. 박순자씨가 26세 젊은 나이에 차린 슈퍼는 48년이 지난 지금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제는 조금만 나가면 대형마트에 갈 수 있는 시대가 됐지만, 그렇지 않았던 1970년대 마을 슈퍼는 주민들의 식재료부터 아이들의 군것질까지 마을 사람들의 생활에 없어서는 안되는 곳이었다. 미 공군의 폭격이 한창이던 때 개업한 이곳은 여느 마을의 슈퍼가 하는 역할에 더해 ‘탄피 중개’도 맡았다.

박씨는 "먹고 살려고 슈퍼를 열었지. 탄피를 모아서 고물취급업자한테 넘기는 일을 하게 될지는 생각지도 못했어"라며 "어느 날부터 탄피가 돈이 되니까 마을 사람들이 탄피를 막 주우러 다녀. 주워서 어디 가져다 줄 데가 없으니까 슈퍼로 들고 오기 시작한 거지"라고 돌이켰다.

탄피는 미 공군의 폭격으로 바다와 논을 잃어 먹고살기 어렵던 마을 사람들에게 구원의 손길과 같았다. 탄피를 주워 팔면 적어도 며칠은 끼니를 때울 수 있었고, 어린 아이들의 간식도 사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박씨는 "내가 탄피를 가져오면 하나에 75원을 줬어. 그리고 고물취급하는 사람한테 80원에 넘기면 그 사람들은 한 100원에 팔았을거야"라며 "나도 중간에 마진을 남겨야 하니까…. 근데 사실 탄피 주워다 판다고 사람들 사는 데 얼마나 도움이 됐겠어. 워낙 살기가 어려웠거든"이라고 설명했다.

탄피 캐처가 돼버린 농부·어부·학생들
목숨걸고 주운 탄피 들고 가게 왔었지

삶에 큰 보탬이 되지 못해도 안 줍는 것보다 주워서 몇 십 원이라도 받는 것이 절박했던 시절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금속 탐지기까지 동원해 사격이 멈춘 밤마다 논과 갯벌, 미 공군 폭격 표적이던 농섬을 샅샅이 뒤졌다. 신주 함량이 많고 큰 탄피를 찾는 날이면 복권에라도 당첨된 듯 기뻐했다.

"탄피 주워서 가져오면 어린애들은 군것질을 실컷 할 수 있고, 학생들은 학비로 쓰기도 하고…. 아이들이고 어른이고 할 거 없이 전부 탄피에 혈안이 됐지."

당시 마을에는 100명이 넘는 중학생들이 있었다. 지금이야 중학생 나이가 되면 중학교를 가는 것이 당연하지만, 1970년대에는 돈이 없으면 학교에 갈 수 없었다. 학교를 가고 싶었던 청소년들은 열심히 탄피를 주워 슈퍼로 들고 왔다.

"학교는 가고 싶은데 돈이 없으니까 못 가는 거야. 그러니까 이 어린아이들이 학교갈 시간에 탄피를 주워 오는 거지. 돈으로 바꾼 다음에 꼬박꼬박 모아, 학교 가려고."

공부를 할 수 있다는 희망으로 시작한 탄피 줍기는 수많은 아이들의 목숨을 뺏기도 했다. 불발탄을 분해하다 폭발로 사망하는 등 목숨을 걸어야 했다.

박씨는 "그때 죽는 게 뭐가 무섭겠어. 이러나저러나 괴로운 건 똑같은데"라며 "비행기 뜨는 게 죽일 듯이 미우면서도 탄피 떨어지겠구나 생각에 반가운 그런 시절이었지"라고 회상했다.

박씨는 주변을 돌아봤다. 마을이 얼마나 조용한지 일깨워 주는 듯 잠시 침묵했다.

"대형마트 생기면서 장사 안되는 건 아쉽지만, 내가 사는 마을이 평화롭다는 건 참 행복한 일이야. 장사 조금 안되어도 좋으니까 제발 시끄럽지만 않았으면 좋겠어."

 

탄피가 돈 되던 시절 매향리로 탄피사업 하러 이사 온 윤석근씨

"집 뒤뜰에 성인 한 명 정도는 거뜬히 들어갈 수 있는 커다란 용광로가 있었지."

화성시 우정읍 매향5리에 살고 있는 윤석근씨는 미 공군 사격 후 떨어진 탄피를 주워다 녹인 뒤 서울에 있는 철사 제조 공장에 판매하는 일을 했다. 서울로 간 녹은 탄피에서 나온 신주는 전화선이나 전선 등을 만드는 데 사용됐다.

윤씨는 "우리 매형이 동두천에 있는 미군부대에서 나오는 탄피를 녹이는 사업을 했는데 매향리에 탄피가 많이 나온다는 이야기를 듣고 매향리로 사업장을 옮긴 거야"라며 "나도 같이 사업하려고 매향리로 왔지"라고 회상했다.

1969년, 윤씨에게 매향리는 모든 사람들이 하늘과 빨간 깃발만 바라보고 사는 참 이상한 마을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윤씨 역시 하늘과 빨간 깃발만 바라보게 됐다. 사격이 멈추는 순간 탄피를 주우러 달려야 했기 때문이다. 경운기 등 탄피를 많이 주워 운반할 수 있도록 하는 다양한 기계도 동원됐다.

"폭격하는 소리를 얼마나 많이 들었으면 어느 날부터는 드르륵 탄창 소리에 ‘아 이번에 쏜 것은 30발짜리다’ 이렇게 바로 알게 되는 거야"라며 "사격할 때 탄창 돌아가는 소리가 큰데 그거 듣고 몇 발이나 쏘는지 알 수 있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

윤씨가 황당하다는 듯이 웃었다. 마을 사람들을 폭격 전문가로 만든 미 공군이 떨어뜨린 탄피는 윤씨 집 뒤뜰에 놓인 용광로로 들어갔다. 용광로는 하루도 쉬지 않고 매일 새빨간 불을 뿜었다. 적게는 수백 개에서 많게는 수천 개의 탄피가 용광로 속에서 녹아내렸다.

탄창소리 귀 기울이다 청력 약해졌지만
전투기까지 녹여팔 정도로 사는데 도움

그렇게 탄피가 녹으면서 물처럼 나온 신주는 네모난 틀에 부어 굳혔다. 네모난 신주는 한 개에 120원가량의 값을 받았다. 당시 빵 한 개가 5원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꽤 큰 돈이었다.

윤씨는 "그때 매향리에 탄피 녹이는 사람들이 3명 있었는데 나만 직접 녹여서 팔았어. 마진이 좋았지"라며 "근데 이것도 경쟁이 붙어서 쉽지가 않더라고. 뒤로 갈수록 돈은 많이 못 벌었던 것 같아"라고 돌이켰다.

뒤뜰의 용광로는 탄피만 녹인 것이 아니었다. 마을에 불시착한 전투기도 용광로로 들어갔다.

"어느 날 마을에 전투기 하나가 뚝 떨어졌는데, 양은으로 만든 전투기를 조각내서 녹이고 팔고 하니까 사는 데 꽤 도움이 됐지."

탄피를 녹여 파는 사업은 1990년대 중반 미군이 탄피 재질을 고철로 바꾸면서 멈춰야 했다. 당초 탄피는 구리로 만들었는데, 미군이 비용 절감을 위해 고철 탄피를 만들기 시작하면서 더는 탄피에서 신주를 얻을 수 없었다.

미군이 고철 탄피를 사용하기 시작할 즈음에 사격장이 매향리를 떠난 것도 사업을 정리하는 하나의 이유가 됐다.

윤씨는 "사업해서 잘 먹고 잘살아 보려고 온 마을인데 고생만 엄청나게 많이 했지"라며 "탄창 돌아가는 소리만 듣고 몇 발 나가는지 알던 귀는 잘 들리지도 않게 됐어"라고 말했다.

윤씨는 요즘 농사를 짓고, 바다에 나간다. 전쟁 속에서 매일 전투를 치르던 때보다 형편도 좋아졌다.

그는 "이제는 조금 평화롭게 살아야지"라며 "그냥 지금이 좋아. 바라는 것도 없어"라고 전했다.

이금미·양효원기자
사진=김근수기자

저작권자 © 중부일보 - 경기·인천의 든든한 친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