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세 시대라 하지만 은퇴는 항상 서글프다. 최근 만난 윤수원 수원시립합창단 단원은 오는 11월 은퇴를 앞두고 있다. 그의 은퇴는 자신 뿐 아니라 합창단에게도 특별한 일이다.

첫시작을 수원시립합창단에서 시작해 그 마지막까지 함께한 굉장히 드문 케이스기 때문이다.

윤 단원은 은퇴가 얼마 남지 않은 사람으로 보이지 않을 만큼 활기차고 생기가 넘쳤다. 합창단은 은퇴하겠지만 그의 인생은 아직도 진행중이기 때문일 것이다.
 

- 자기소개 부탁한다
"수원시립합창단에서 37년째 활동하고 있는 알토 윤수원이다. 올해 11월 은퇴를 앞두고 있다."

- 성악을 하게 된 계기가 있나?
"어렸을때 부터 노래부르는 것 자체를 좋아했다. 국민학교 시절 은사님을 만나 초등학교 합창단에서도 활동을 했었다. 당시에는 메조 소프라노 파트를 맡았는데, 라디오 방송에 나가 동요를 부르는 녹음도 할 정도로 많이 빠져있었다."

- 라디오 방송까지 할 정도면 가족들도 지원을 해줬을 것 같다
"어렸을때 취미로 할때 까지만 해도 크게 반대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아버지는 내가 노래를 부를때면 커다란 녹음 테이프로 녹음 해주곤 했었다. 다만 내가 노래를 업으로 삼겠다고 한 이후에는 꽤 반대가 심했다. 음악 쪽은 다 경제적인 부담이 크지만 성악 쪽은 레슨비가 상당히 많이 드는 편이다. 내 경우에도 경제적으로 어렵다보니 고등학교 시절 음악선생님이 레슨을 해줘 대학에 가게 됐다."

- 대학때는 어땠나?
"그때까지만 해도 사실 크게 어려움을 느끼거나 하지는 않았다. 대학생 때도 교수님들께 지도를 받고 또 혼나기도 하면서 노래부르는 것에 집중했다. 당시에는 합창단에 들어간다는 생각보다도 그냥 노래를 부르는 것 자체만에 푹 빠져있었던것 같다."

- 졸업 후 얼마안돼서 수원으로 왔다
"1983년에 수원시립합창단이 창단됐고, 나는 졸업한 뒤인 84년에 곧바로 이곳에 오게됐다. 창단 멤버는 아니지만 시립합창단의 역사화 함께 했다고도 할수 있겠다. 당시에 수원시립합창단이 생겼다는 이야기를 듣고 친구와 오디션을 봤었다. 사실 유학을 하고 싶었지만 경제적으로 어렵다보니 곧바로 취업하게 됐다. 80년대 수원은 산좋고 물좋은, 그야말로 시골이었다. 출근을 하기 위해 매일 서울에서 수원역까지, 그리고 옛 시민회관까지 가곤 했다. 지금이야 대중교통이 잘 돼 있지만 그시절에는 버스라는 것도 그렇게 잘 돼 있지 않았다."
 

수원시립합창단서 첫 시작 37년 동행

수원시가 후배들 공연활동 전념할 환경 만들어줬으면

- 그런부분이 가장 어려웠나?
"출퇴근은 어렵지 않았다. 오히려 합창이라는 부분 자체가 어려웠다. 어렸을 때는 합창을 했지만, 이후 입시를 준비하고 대학교에서 성악을 전공을 하다보니 솔로곡을 오랫동안 불러왔다. 그러다 합창단에 들어와서 다시 다른사람들과 화음을 맞춰야 하니, 어려움을 꽤 겪었다. 해보지 않았던 영역이다보니 그랬던 것같다. 연습에서도 애를 먹었다. 예를 들면 1대 지휘자 이상길 선생님 같은 경우 10명이 완벽하게 소리를 통일 하도록 연습을 시켰다. 내 소리가 아니라 다른 소리를 듣고 맞춰야 하는 게 너무 힘들었다. 그래도 함께 연주를 했을 때 성취감이 좋았던것 같다."

- 37년간의 활동중 기억에 남는 공연이 있나?
"여러가지 있다. 보통 첫 공연을 오래도록 기억하는데, 오히려 첫 공연보다는 첫 시외, 해외 공연이 더 기억에 크다. 내가 합창단에 들어간지 얼마 안돼서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공연을 하게됐다. 당시 우리 합창단은 세정문화회관 소강당에서 공연을 하게 돼있었다. 관객들이 많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서다. 그런데 막상 공연을 하려고 하니 관객이 너무 많이 와서 공연을 보지 못하고 돌아가야 하는 정도였다. 그때 가슴이 참 벅찼던 기억이 난다. 또 1996년 호주 시드니에서 진행된 세계합창심포지움에 참여 했을때도 기억난다. 당시 합창단이 세계적으로 여러번 초대를 받고 했었는데 경비가 없어 못가는 상황이 많았다. 그러다 이때 처음으로 시드니에 가게됐다. 합창단으로서도 첫 해외 공연이고, 나 자신으로서도 처음 해외에서 공연을 하게 됐다. 당시 외국사람들에게 우리나라의 창작곡을 들려줄 수 있는 기회를 가졌고, 외국인들에게 이 합창을 들려줄때 참 감격스러운 당시가 떠오른다."

- 또 재밌는 에피소드같은것은 없나?
"한창 공연을 하던 중에 있었던 일이다. 합창을 하며 다같이 아래를 내려다 보는 상황이 있었는데, 굉장히 진지한 오페라였고 집중해야되는 때였다. 그런데 같이 공연을 하던 단원의 양말에 구멍이 뚤린 모습을 다함께 보면서 이를 악물고 참으며 공연을 진행했었다. 공연을 마치고 대기실에서 한참 웃었던 기억이 난다."

- 4명의 상임 지휘자 모두를 겪었다. 누가 가장 좋았나?
"특별히 누가 좋았다, 라고 하기가 어려운것이 합창은 같은 곡이라도 어떤 지휘자가 지휘하느냐에 따라 곡의 느낌이 크게 달라진다. 지휘자마다 색채가 다르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처음 지휘를 맡은 이상길 선생님 이후에는 민인기 지휘자는 나와 동갑, 윤의중 지휘자는 4살 연하, 지금 박지훈 지휘자는 12살이나 차이가 난다. 오랫동안 이곳에서 활동했다는 것이 실감난다."

- 시립합창단의 역사와 함께 했다. 이렇게 오랫동안 컨디션을 유지할수 있는 비결이 있나?
"나도 그렇고 많은 성악전공자들이 그렇겠지만, 목이 아프거나 컨디션을 유지하기위해 필요하면 아예 말을 안하고 수첩을 이용해 소통하기도 한다. 성악가들은 목으로 연주를 하는 사람이다보니 목이 금방 상하곤 한다. 성악가의 직업병이다. 나도 두번이나 성대 수술을 받았다. 특별한 관리법 보다는 각자의 관리법으로 꾸준히 관리를 해야 성악가로서의 수명을 늘릴 수 있다."

- 오는 11월께 은퇴를 앞뒀다. 소감은?
"3년 전까지만 해도 ‘내가 은퇴가 3년 남았나?’라는 자문과 울음이 나오곤 했다. 그런데 오히려 몇달 남지않은 지금은 ‘아 빨리 그만둬야겠다’라고 농담조로 후배들에게 말을 하곤 한다. 아쉬움이 없지는 않다. 37년 동안 일하면서 몇 번이나 그만두고 싶은 생각도 있었다. 그래도 성악, 합창에 대한 열정과 애정으로 지금까지 해온 것 같다."

- 가족들은 어떤 반응인가?
"아이들이 참 좋아한다. 한창 활동을 할때는 아이들이 ‘합창단을 그만두면 안되냐’며 볼멘 소리를 하곤 했다. 당시에만 해도 합창단 연습이 거의 매일 있었고 주5일 근무도 없어 아이들과 함께 해주지 못했다. 지금이야 아이들이 어른이 됐으니 덜하지만 말이다. 또 공무원인 신랑이 나보다 먼저 은퇴했다. 내가 은퇴할 때가 되니 아직 더 일할 수 있는 나이임에도 은퇴를 준비하는 모습을 보며 아쉬움을 느끼는 것 같다."

- 은퇴 이후의 계획은?
"주변에서 다들 어떤 계획이 있냐 묻는데, 사실 무계획이라는 계획이다. 딱히 명확한 계획은 아직 없다. 그저 하고 싶었던 피아노와 교회활동에 조금 더 시간을 쓸 수 있게 된것에 감사한다."

- 끝으로 할말은
"나는 이제 은퇴하지만, 수원시립합창단은 내가 은퇴한 이후, 그리고 내가 죽고난 뒤, 100년 후에도 지속되는 전통이 있는 합창단으로 나아갔으면 한다. 이를 위해서는 지금 있는 후배들이 공연 활동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해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수원시가 후배들이 공연이나 실력 외적인 부분에서 걱정 하지 않고 활동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줬으면 좋겠다."

백창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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