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감학원 이야기 좇는 하금철 연구자

"어느 날 자료를 뒤지다가 발견한 선감학원이라는 글자가 뇌리에 깊게 박혔어요. 지은 죄도 없이 수용생활을 해야 했던, 우리 사회로부터 버려진 존재로 치부됐던 이들에 대한 이야기를 찾아 나섰죠."

장애인 언론 매체 기자에서 어느 순간 선감학원 연구자로 거듭난 하금철(37)씨의 말이다. 언론계에 몸 담고 있다가 선감학원 사건의 존재를 마주한 하씨는 인생의 변곡점을 맞게 됐다. 그는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과정을 밟으며 연구를 이어가고 있다. 그는 사회가 쓸모없다고 여겨 내다 버린 사람들의 이야기를 쫓아다니는 ‘이야기의 넝마주이’를 꿈꾼다.

끝나지 않은 선감학원의 이야기. 누군가에게 이미 지나가 버린 과거의 이야기일지 몰라도, 그에게만큼은 현재의 문제다.
 

어느 날 발견한 ‘선감학원’이라는 네 글자

하씨는 2019년 출간한 선감학원 피해생존자 구술 기록집, ‘아무도 내게 꿈을 묻지 않았다’라는 책의 공동집필자로 참여했다. 하씨가 선감학원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기자 시절, 장애인 시설의 인권침해 문제를 들여다보면서다.

선감학원은 일제강점기인 1942년 ‘조선소년령’ 발표에 따라 안산시에 설립된 감화원이다. 그러나 해방 후에도 폐원되지 않고 부랑아 갱생과 교육이라는 명분으로 도시 내 소년들을 강제로 격리·수용했고 1982년까지 운영됐다.

"장애인 시설에 수용되는 분들이 겪는 인권 침해 문제가 많았어요. 이 같은 문제를 취재하다가 선감학원이라는 시설을 접하게 됐죠."

일제강점기부터 존재했던 선감학원, 혹여 일제의 잔재가 아닐까 하는 생각에 시작했던 그의 연구는 결국 한국사회 전체의 문제로 확대됐다. 산업화 시대, 쓸모없는 사람으로 치부됐던 이들을 몰아넣었던 부랑자 시설 정책에 대한 연구를 시작하게 되면서다. 그는 그렇게 연구자로 방향을 틀었다.

"부산 형제복지원 사건에 앞서 선감학원이 있었어요. 의문점이 끊이지 않았죠. 대체 이들은 왜 죄도 없이 잡혀 와야 했나. 왜 버려진 존재가 됐나 말이에요."
 

해방 이후에도 유지된 일제 잔재, 청산되지 못한 채 남았다

하씨는 일제강점기 때 만들어진 선감학원이 해방 이후에도 ‘꼭 필요했어야만 했나’라고 질문을 던진다. "일제강점기의 유산으로 남아있던 시설이지만, 독립된 국가가 물려받을 이유는 없잖아요? 사회적으로 가장 약한 사람들을 수용 시설에 가둬 놓는, 어쩌면 개발주의에 빠진 한국 사회 스스로의 욕망이 투영된 것이라고 봐요." 하씨는 선감학원 수용자 대부분한테서 ‘공통점’을 찾았다고 말한다. 바로 이들이 어느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한 채 끝없는 악순환의 굴레에 빠졌다는 것.

"실제로 이들 피해자들을 만나보니, 대부분이 선감학원뿐만 아니라 보육원 등 보호시설들을 전전하셨더라고요. 선감학원 설립·유지 명목은 ‘부랑아 갱생’인데, 이들은 퇴소하고 나서도 안정적인 직업을 갖거나 정상적으로 사회에 복귀하지 못하고 구걸하고, 또 잡혀 와서 시설에 수용되고 그런 인생이 반복됐어요."

선감학원의 존립 목적이라는 ‘부랑자 갱생’ ‘사회선도’. 이는 완전히 실패해버린 글자가 됐다. 오히려 선감학원을 거치면서 이들 소년들은 우리 사회로부터 완전히 배제당하고, 낙오시켜버린 것이다.

하씨는 "선감학원은 대한민국 전체가 도시를 건전하고 위생적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차별적인 시선이 녹아있는 곳"이라고 강조했다.

하씨는 선감학원 피해생존자들의 이야기를 담은 책, ‘아무도 내게 꿈을 묻지 않았다’를 공동집필했다. 그는 이 책에 담지 못한 피해생존자의 이야기가 떠오른다며 말을 이어 나갔다.

"선감학원 피해생존자 중에 인천의 한 노숙인 시설에 살고 계신 분이 있었어요. 그분은 선감학원에서 나온 이후 원양어선에 올랐는데, 다리가 절단되는 사고로 결국 다시 시설에 들어와야만 했죠. 성인이 되고 나서도 사회 언저리에서 힘든 삶을 살아야 하는 악순환의 고리에 빠져 있는 게 가슴 아팠어요."

하씨는 선감학원에 끌려온 이들이 다시 사회에 나가 아무렇지도 않은 척 보통사람처럼 살아나간다는 건 어려운 일이라고 말한다.

"선감학원에 끌려갔다 오면 낙인이 찍히게 되는 거죠. 그들이 사회에서 정상적으로 어우러져 생활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에요."
 

선감학원은 1942년부터 1982년까지 40년간 국가폭력이 자행된 소년수용소다. 이곳을 스쳐 간 4천700명 소년들의 삶은 무너졌지만, 아직 국가 차원의 진상규명·사과는 요원하다. 첫번째 흑백 사진은 1950년대 촬영된 안산 선감도의 모습. 직원 관사와 소년들이 거주했던 기숙사의 모습이 담겨있다. 그 아래는 6일 상공에서 촬영한 선감도 전경. 선감학원 본부가 있었던 터에는 경기창작센터가 들어서 있다. 중부일보DB·국가기록원
선감학원은 1942년부터 1982년까지 40년간 국가폭력이 자행된 소년수용소다. 이곳을 스쳐 간 4천700명 소년들의 삶은 무너졌지만, 아직 국가 차원의 진상규명·사과는 요원하다. 첫번째 흑백 사진은 1950년대 촬영된 안산 선감도의 모습. 직원 관사와 소년들이 거주했던 기숙사의 모습이 담겨있다. 그 아래는 6일 상공에서 촬영한 선감도 전경. 선감학원 본부가 있었던 터에는 경기창작센터가 들어서 있다. 중부일보DB·국가기록원

배·보상 문제 빠진 ‘과거사법’…또 다른 논란거리 생길 수도

하씨는 선감학원 피해자들에 대한 명예회복과 보상 조치도 조속히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배·보상 조항이 빠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과거사법) 때문에 또 다른 문제가 생길 우려가 있어서다.

"과거사 피해자들이 법원에서 명예회복이나 보상을 받으려고 해도 과거사법에 보상에 관한 규정이 없기 때문에 사실상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위원회의 진상 규명 결과는 법원에 제출할 증거 용도밖에 안 됩니다. 이렇게 되면 피해자들은 원자화된 개인들로 존재할 수밖에 없어요. 때문에 명예회복이나 보상조치도 집단으로 이뤄질 필요가 있어요."

2기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위원회는 지난달 27일 선감학원 아동 인권침해 사건에 대한 조사 개시를 결정했다. 진실화해위원회는 최초의 진실규명 조사개시 결정일 이후 3년간 진실규명활동을 하고, 필요한 경우 1년을 연장할 수 있다.

"진실화해위원회 활동이 종료된 이후에 피해자들이 개별적으로 피해보상과 관련돼 소송을 하면, 누구는 보상을 받고, 누구는 받지 못하게 되는 형평성 문제가 생길수 있고, 피해자들 간에 갈등을 낳을 소지가 있어요. 일괄적인 배·보상을 받을 수 있도록 해야 사회적 논란을 줄일 수 있어요."

하씨는 진실화해위원회 조사과정에 대해서도 걱정이 많다. 수 십년에 걸친 선감학원의 인권침해 역사를 겉핥기식으로 들춰내선 그 진상을 명확히 알 수 없기 때문이다.

"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경우 사건의 발발과 종료가 명확하기 때문에 가해자와 피해자를 선명하게 파악할 수 있지만 선감학원 사건은 운영된 기간만 40년이라 기존 과거사 사건 조사방식과는 다르게 접근해야 합니다."
 

선감학원은 대한민국 현대사의 그림자, 부랑자 정책이 원인

하씨는 과거 산업화를 거쳐 눈부시게 발전한 우리나라의 현대사 속에서 부랑자는 어떻게 취급 받아왔는지, 또 국가는 이들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를 면밀히 살피고 있다. 선감학원, 부산 형제복지원, 서산개척단 사건 등 대한민국의 ‘부랑자 정책’은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왜 시작됐을까.

"시설에 수용된 사람들은 우리 사회의 극빈층이에요. 사실 사회복지 영역에서 해결됐어야 하는 사람들을 시설에 수용하는 방식으로 해결할 수밖에 없었는지 궁금해요."

국가가 이들을 사회의 ‘쓸모없는 부분’으로 치부해버리면서 시작된 문제. 선감학원을 만들고, 또 유지하면서 부랑아를 가둬놨던 과거 대한민국의 정책은 폭력 그 자체였다.

"빈민에 대해 치안 중심적인 정책이 이뤄져 왔죠. 이들을 못난 사람으로 여기고, 숨겨야 하는 존재로 생각한겁니다. 1987년 형제복지원 사건이 검찰 수사를 받게 되면서 이 같은 실상이 표면적으로 드러났지만, 부랑민에 대한 국가폭력 문제와 관련된 것은 제대로 처벌이 되지 않았고, 이후에도 시설이 유지된 이유이기도 하죠."

김수언·김형욱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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