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단 수집 사진·영상 등 분석… 월미도 인민군 500~600명 정도
연합군, 주민들까지 적으로 간주… 전력 절대우위 앞세워 융단폭격
'신화화'보다는 진실보는 시각 필요

연합군이 해병 1사단에 대한 지원을 위해 상륙 지휘에 따라 병력들이 월미도로 2차 상륙하는 장면. 사진=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
연합군이 해병 1사단에 대한 지원을 위해 상륙 지휘에 따라 병력들이 월미도로 2차 상륙하는 장면. 사진=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

1950년 6월 25일 북한이 남한을 침범해 전쟁이 발발하며 사람들은 무작정 남쪽으로 피난을 떠났다.

26일 오전 10시 경기 장단 사람 1천여명은 인천 공회당과 여러 병원에서 자리를 잡고 있었다.

인천은 피난민과 전투원 부상병까지 몰려 아수라장으로 바뀌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라디오 방송에서 "서울에 있는 모든 국민은 집 밖으로 나오지 말고 머물라"고 말한 뒤 27일 오전 3시 진해로 야반도주 했다.

나머지 정부 관료들은 오전 7시 특별기차 편으로 남쪽으로 피난했다.

또 다른 자료에선 ‘27일 오전 3시 30분 서울에서 탈출한 첫 번째 한국인은 대통령 이승만과 프란체스카, 김장홍 경무대 경찰서장 등 6명으로 대구로 도망쳤다’고 나와 있다.

이날 오후 7시 5분 주한 미군사고문단 대령 와이트는 도쿄 극동사령부 아몬드 장군에게 "이승만과 연락이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아몬드 장군은 와이트에게 "떠나지 말고 사수하라"고 지시했다.

인천시장 지중세도 무책임한 건 마찬가지였다.

인천상륙작전이 진행된 뒤 인천에서 상처를 입은 어린이를 업고 있는 할머니와 한 가족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부서진 집안에서 무엇인가를 찾고 있다. 사진=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
인천상륙작전이 진행된 뒤 인천에서 상처를 입은 어린이를 업고 있는 할머니와 한 가족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부서진 집안에서 무엇인가를 찾고 있다. 사진=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

지중세는 시청 직원들에게 "사태가 급박하니 피난은 각자가 행동을 취하라"는 지시를 하고 시청을 포기하고 피난했다.

이에 대해 전갑생 서울대 사회발전연구소 연구원은 "인천시장과 시청 직원들은 인천시민, 피난민에게 제대로 알리지 않고 이들의 생명도 지키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군은 인천상륙작전이 있었던 1950년 9월15일을 기념해 매년 이날 인천 중구 월미도 앞 해상에서 ‘인천상륙작전 전승기념식’을 재연하며 ‘승전 신화’를 자축한다.

국방부가 주최하고 해군본부, 인천시가 공동주관하는 이 행사에는 해군참모총장과 인천시장, 국회의원 등이 참석해 불가능한 작전으로 승리한 전투라고 성과를 추켜 세운다.

재향군인회와 각종 보수 세력은 인천상륙작전을 비롯해 6·25전쟁에서의 승리를 강조하고, 이는 정치적으로 악용되고 있다.

지난 2016년 7월 개봉한 영화 ‘인천상륙작전’은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확률 5천대1, 불가능에 가까운 작전"이라고 광고하며 신화화하는 데 최정점을 찍었다.

하지만 인천문화재단은 그동안 수집해온 기록과 사진, 영상 등의 각종 자료로 판단해 볼 때 인천상륙작전이 ‘승전 신화’로 왜곡됐다고 지적했다.

한국사회에선 위험천만하고 불가능한 작전을 위장 및 기습으로 성공시킨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오히려 인천상륙작전 당시 미군이 주도한 연합군은 물량과 장비, 화력 측면에서 절대적으로 우세해 신미양요 때와 마찬가지로 무혈입성했다는 게 인천문화재단의 설명이다

‘인천기계공업주식회사’라는 간판이 걸린 공장 건물 앞에서 홀로 남아 울고 있는 아이 모습. 사진=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
‘인천기계공업주식회사’라는 간판이 걸린 공장 건물 앞에서 홀로 남아 울고 있는 아이 모습. 사진=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

당시 월미도의 벙커 참호에 있던 북한 인민군은 500~600명 정도로 많지 않았고, 미군이 부평까지 밀고 들어오면서 잡은 인민군 포로 수가 소수였다고 인천문화재단은 전했다.

인천문화재단은 "미군 중심의 연합군이 인천상륙작전에서 압도적으로 우세했기에 지는 게 오히려 이상하다는 게 학계의 시각이다"며 "국방대학교나 군사관학교에서 6.25를 불가능한 작전이었다고 교육하고, 영화에선 승리 신화, 불가능한 작전으로 전승만 강조됐다"고 했다.

전갑생 연구원은 인천에서 북한 인민군의 전력이 시내에 있는 대공포를 제외하고 없다시피 했다고 설명했다.

더욱이 해군 사령부나 유엔 사령부가 봤을 때 월미도에 있는 적으로 인민군 500명에 월미도 주민 500명을 합쳐 1천명으로 봤다고 언급하며, 한국 국민도 적으로 간주했다고 비판했다.

전 연구원은 연합군의 병력엔 군단 단위가 참여하고 해병대에서도 사단 단위가 투입됐기 때문에 인민군의 인천·서울 병력보다 압도적이었으며, 거대한 프로젝트였다고 강조했다.

따라서 연합군이 인천상륙작전과 같은 대규모 작전에서 폭격을 하기 전에 주민에게 사전에 공지하는 게 원칙이고, 더욱이 전력면에서 압도적일 경우 주민들을 사전에 대피시켜야 하는데, 전술폭격이 아닌 융단폭격을 했다고 맹비난했다.

전 연구원은 "연합군은 인민군 치하에 있을 수 밖에 없었던 한국 국민을 적으로 간주했다. 이런 차원에서만 본다면 인민군 숫자가 연합군보다 더 많을 수 있겠다"며 "하지만 실제 북한의 재래식 무기와 비행기는 전략적으로 볼 때 미국, 유엔군과는 비교가 될 수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인천상륙작전이 있기 전인 9월 초 북한 인민군들이 고향에 보내는 편지를 보면 대규모 전투를 위해 방어준비를 하고 있다고 나와 있다"며 "북한 인민군의 서울, 인천 방어계획 문서에도 나와 있다. 인천상륙작전이 미군 등의 연합군이 인민군 모르게 비밀리에 하는 작전은 아니었다"고 강조했다.

백승재기자

관련기사

저작권자 © 중부일보 - 경기·인천의 든든한 친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