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산의 숨은 ‘주연’

태고사로 향하는 길이 곧 중흥사로 가는 길이다. 태고사는 중흥사와 개울 하나를 가운데 두고 이웃한 작은 절이다. 한때는 중흥사의 부속 암자였지만 현재는 한국불교태고종에 속하는 개별 사찰이다. 그러나 역사적 맥락에서 두 절은 같은 울타리 안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중흥사에 대해선 지난해 경기도 아름다운 사찰 연재를 통해 이미 자세하게 다룬 바 있다. 지난 기사에서 필자는 중흥사로 가는 길이 곧 북한산 등산로 중 하나인 북한산성코스와 동일하고 이는 북한산성을 축성한 숙종의 궤적을 더듬는 일과 같다고 썼다. 해서 북한산과 북한산성, 그에 얽힌 숙종에 대한 이야기를 비롯해 북한산성코스의 특징과 근사한 풍경에 대해서는 재차 쓰지 않는다. 다만 정보 차원에서 덧붙이면 중흥사와 태고사는 북한산탐방지원센터에서 약 3km 떨어져 있으며 걸어서 1시간 10분 정도 걸린다.

사실 오늘날 태고사는 일반 대중에게는 그리 유명한 사찰이 아니고 더욱이 두 발로 등산을 해야만 닿을 수 있는 곳이어서 일부러 찾기에는 ‘관광적인 의미’를 두기가 조금 어렵다. 중흥사 역시 사찰 규모나 접근성에선 태고사와 다르지 않으나 템플스테이를 운영하고 다양한 문화예술 프로그램을 열고 있어 지난 몇 년간 신도 외의 방문객들이 많이 늘었다. 중흥사 손님들이 중흥사에 온 김에 겸사겸사 들르는 절이자 이 부근 최고의 전망대인 천해대(天海坮)에 오를 때 잠시 거치는 코스가 태고사다. 말하자면 중흥사 방문자나 등산객들에게는 조연급의 사찰인 셈이다. 그러나 알면 사랑하는 법. 모르고 지나면 북한산에 자리한 여러 암자 중 한 곳에 불과하지만 알고 보면 북한산의 주연급 사찰이다.



이 사람을 알면 태고사가 보인다

‘알면 사랑한다’는 말의 주어를 태고사로 하기 위해선 오직 한 사람을 알면 된다. 절 명칭과 같은 이름, 태고 보우국사다. 우리나라 불교역사에서 누구나 아는 유명한 스님을 꼽자면 아무래도 신라의 원효대사, 의상대사일 것이다. 불교가 융성했던 고려에선 누구를 떠올릴 수 있을까. 인지도로 보면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로 시작하는 시를 남긴 고려 후기 고승 나옹선사가 가장 잘 알려져 있지 않나 싶다. 태고 보우국사는 나옹선사보다 19년 먼저 태어난 선배 스님이다. 태고 보우, 나옹 혜근, 백운 경한 이렇게 세 스님이 고려 말 혼란했던 시기에 불교의 중흥을 위해 힘썼던 ‘여말삼사’로 일컬어진다.

이중 태고 보우국사는 조계종의 중흥조이자 태고종의 종조로 모셔진다. 보우스님은 선교융합의 정신으로 여러 종파를 통합하고 화두를 들어 수행하는 간화선을 새롭게 드높인 고승으로 평가받는다. 그의 법통은 조선 중기 부용 영관선사와 서산대사가 이어받아 오늘날 한국불교의 기반이 되었다. 한편 보우스님이 이어받은 법통은 선종의 한 종파인 임제종으로, 스님은 1346년 46세가 되던 해에 원나라에 가서 임제스님의 18대 법손인 석옥 청공스님을 만나 임제종의 선법을 이어받고 깨달음의 인가를 받았다. 이때 보우스님이 청공스님에게 선적 경지를 인정받은 결과물이 총 82구의 한시 <태고암가>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이 시는 보우스님이 원나라 유학 전 태고암에서 수행 중 쓴 작품으로 청공스님은 이 시를 보고 득도의 경지라 탄복하고 불법이 동방으로 건너갔다며 그를 칭찬했다. 오늘날, 우리 눈에는 그저 아담하고 별 특징 없어 보이는 산사에서 스님은 얼마나 크고(太) 유구한(古) 것을 보았던 걸까.

깨달음을 얻고 홀연히 삼각산으로 들어간 스님

보우스님은 41세에 북한산, 즉 삼각산에 자리를 잡았다. 중흥사를 중창하고 그 옆에 자신이 수행할 조용한 도량을 새로 지어 동암이라 불렀다. 오늘날의 태고사다. 이때 스님은 아직 원나라 유학 전이었으나 이미 두 차례의 깨달음을 얻고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선승으로 거듭난 후였다. 하여 스님의 법문을 들으려는 사람들의 발길이 연일 이어졌다니, 스님만의 수행 도량이 필요했을 법도 하다. 무르익은 불혹의 나이에 스님은 어떤 기운에 이끌려 태고사를 거처로 삼았을까.

<태고암가>를 들여다보면 ‘암자에 살고 있지만 하늘과 땅을 덮개 삼아 앞뒤가 없으며 동서남북 어느 한곳에 머무름이 없다’고 적었고 ‘백천삼매(百千三昧)가 이 안에 있어, 인연 따라 모든 사물 이롭게 하면서도 항시 적적하다’고도 썼다. 백천삼매란 불교에서 선정에 들어 하나에 대상에 집중하는 정신력을 뜻한다. 암자라는 작고 좁은 공간에서 천지사방을 수용하고 무한의 시간을 사는 초탈함이 묻어있는 내용이다. 내가 어디에 있든, 근본자성을 깨달아 주인공으로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가르침을 그의 한시에서 얻는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머리로 이해할 뿐 마음으로 알아차리기는 쉽지 않다. 그러니 왜 태고암이었냐는 질문은 우문일 수 있겠다. 스님도 그저 인연 따라 자리하셨을 뿐이니 말이다.

생사 관문 부수니 맑은 바람 태고암에 불어

보우스님은 양주 회암사에서 13세에 출가했다. 회암사는 인도 승려 지공화상이 1328년 인도의 불교대학 나란타사를 본 떠 창건한 절로 태고 보우국사를 비롯해 나옹선사, 무학대사 등 걸출한 선승들이 수행한 대찰이다. 터만 남았지만 역사적 가치가 높은 문화유산으로 지난해 경기도 아름다운 사찰 연재에서도 비중 있게 소개했다. 청년기를 회암사에서 수행한 보우스님은 경전 공부에 매진해 26세에 교종에서 치르는 승과인 화엄선에 합격했다. 화두 정진에 진력한 스님으로 알려져 있지만 고려 말에는 교종과 선종의 경계가 모호했고 수행 초기에는 수도자로서 기반을 닦던 시기였기에 선교를 겸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스님은 경전은 방편일 뿐 참다운 수행을 위해선 참선에 전념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후 31세에는 개성 서쪽의 성서 감로사, 용문사 상원사 등에서 수행했다. 33세 때 감로사에서는 7일간 먹고 자지 않는 용맹정진으로 홀연히 깨친 바가 있었다고 전한다. 19세부터 만법귀일(萬法歸一 :모든 것이 하나로 돌아간다) 화두를 참구했으니 그에 대한 깨달음이 아니었을까 싶다. 두 번째 깨달음은 37세에 대승불교의 근본경전인 <원각경>을 읽다가 찾아왔으며 이듬해 조주선사의 ‘무(無)’자 화두를 참구해 마침내 큰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그 때가 1338년 1월. 스님은 ‘생사의 견고한 관문을 부수고 난 뒤 맑은 바람이 태고암에 불어오네’라고 노래했다. 태고사에 들기 전에 이미 ‘태고(太古)’를 말하던 스님이었다.

생과 멸은 하나, 고려는 망했지만 스님 가르침은 오늘까지 이어져

오늘날의 태고사를 둘러보는 데는 10분이 채 걸리지 않는다. 요사채를 입구로 계단을 통해 한 층 오르면 대웅보전과 보물 제611호 원증국사탑비가 자리한 절마당이 나온다. 대웅보전 뒤로 다시금 계단을 오르면 산신각과 보물 제749호 원증국사탑을 만날 수 있다. 조선 숙종 때는 131칸에 이르는 큰 사찰로 승병이 주둔하며 서적 출판용 목판과 화약용 흑탄을 다량으로 비축했다고 하나 중흥사와 함께 쇠락하면서 1800년대 후반에는 폐사지로 남았다. 현대에 와서야 사찰의 모양새를 갖추고 보우스님을 기리는 탑비와 탑을 모시며 명맥을 잇게 되었다.

도량 안에서 원증국사탑비는 대웅보전보다 더 큰 존재감을 보여준다. 원증(圓證)은 보우스님의 시호다. 고려 우왕 11년에 조성된 원증국사탑비는 거북받침돌 위에 약 3.3m로 서 있는데 보우스님의 출생부터 입적까지의 행적이 자세하게 적혀 있다. 비석의 글은 당시 최고 문장가였던 이색이 지었고 명필 권주가 썼다. 56세에 왕사로, 71세에 국사로 책봉되며 공민왕의 신뢰를 얻었던 스님인데다 대중교화와 불교중흥의 공을 톡톡히 세워 백성의 존경을 받았으니 위엄 넘치는 탑비와 공들여 만든 사리탑이 당시의 위상을 증명한다.

보우스님은 원나라 유학시절 원나라의 볼모로 있던 공민왕과 인연을 맺고 고려로 귀국했다. 공민왕은 스님을 신임해 재위 5년에 왕사로 책봉했으며 원융부를 설치해 불교 종파를 하나로 모을 수 있도록 신경써주었다. 보우스님은 고려를 자주적으로 발전시키고자 했던 공민왕의 바람에 부응해 불교개혁을 위해 노력했다. 또한 스님은 공민왕이 신진세력인 신돈에게 전권을 맡길 때 우려를 표하고 충고를 했지만 신돈의 무고로 속리산에 금고 된다. 이후 수행정진 하던 보우스님은 신돈이 물러난 후 71세에 국사로 책봉되었다.

도량의 가장 윗자리에 세운 원증국사탑은 3단 기단 위에 탑신을 올린 후 독특한 머리장식으로 마감한 사리탑이다. 옛 탑 앞의 승탑 1기는 근래에 세운 것이다. 2기의 탑 뒤쪽으로 산길을 따라 10분 쯤 오르면 보우스님이 참선했다는 거북바위, 천해대가 나온다. 천해대에 서면 중흥사와 태고사, 행궁지를 포함한 북한산의 웅숭깊은 골짜기와 백운대, 만경대, 용암봉 등 북한산 봉우리가 한눈에 들어온다. 새벽이라면 그 이름처럼 하늘과 바다가 맞닿은 듯 운해(雲海) 절경을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천해대에 가부좌를 틀고 앉으니 보우스님이 ‘구름산’을 노래한 시 ‘운산음(雲山吟)’의 몇 구절이 떠오른다.

산 위의 흰구름 더욱 희고/ 산 속 흐르는 물 쉼 없이 흐르네/ 이 속에서 살고자 했더니/ 흰구름 나를 위해 한 자리 비워주네….

글·사진=유승혜 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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