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말기암 환자로 죽는 게 꿈이야." 교구의 호스피스 병원을 담당하고 있는 한 동료 신부로부터 최근 들은 말이다. "형님, 그게 무슨 말이에요? 요즘 사람들은 팔팔하게 구십 구세까지 살다가 이삼일 앓고 죽는 게 꿈이래요. 대부분 앓지 않고 한 번에 가는 걸 원하는 것 같던데요?" "그건 이기적인 생각이지. 남은 가족을 생각하면, 그렇게 떠나는 게 얼마나 큰 슬픔을 남기는지 몰라. 본인한테도 그렇고. 병원 일을 하다보면 많은 경우를 보는데, 준비도 없이 허망하게 떠난 경우 남은 가족들이 얼마나 힘들어하는지 몰라. 그러고 보면 말기암 환자로 호스피스 병원에 오신 분들은, 남은 기간 동안 자기 삶을 정리하고 가족들과 작별의 시간을 준비할 수 있지. 그래서인지 나도 말기암 환자로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짧았지만 긴 여운을 남긴 대화였다. 췌장암 재발로 항암치료 중인 모친을 동반하며, 병마와 싸우는 주위의 많은 분 소식을 접하며, 어떤 마음으로 병과 죽음을 바라보아야 할지 고민이 없지 않았다. 말기암 환자로 죽고 싶다는 병원장 형님과의 대화는, 인생의 남은 시간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죽음을 피할 수 없어 마지못해 마주해야 하는 고역의 시간일 수도, 자신의 살아온 삶을 돌아보고 소중한 가족과 마음을 열고 대화하며 아름다운 추억을 만들 수 있는 시간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게 하였다. 건강히 오래 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살아온 삶을 정리하고 남은 삶을 자기 자신과 그리고 가족과 이웃과 화해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죽음을 바라보는 두 관점이 마주한다. 한편에는 어떻게든 병을 고치고, 죽음이 오는 시간을 늦추기 위해 노력한다. 다른 한편에는 죽음을 피해야 할 것이 아닌 마주하고 받아들여야 할 것으로 바라본다. 생명은 소중한 것이기에, 첫 번째 관점을 포기해서는 안 되겠지만, 언젠가는 두 번째 관점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렇지 못할 경우 삶에 집착하고 아름답지 못한 마지막을 맞이할 수도 있다. 그런데 그 받아들임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닌, 치러야 할 영적인 투쟁이다.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고 겸손한 자세로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풍요로운 삶은, 죽음이 삶의 한 과정임을 받아들이는 데서 비롯합니다." 김수환 추기경이 남긴 말씀이다. 죽음이 무조건 피해야 할 것이 아닌, 살아온 삶의 한 과정으로 받아들이는 것, 그것은 쉽지 않지만, 분명 삶을 풍요롭게 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모든 인간이, 심지어 명의들 조차도, 모든 병을 고칠 수 없으며, 결국 병과 죽음 앞에서 자신의 한계를 인정한다. 오만한 인간에게 모멸스러울 수도 있는 이 한계의 인정은, 실은 진정한 자유를 주고, 인간을 진정 인간답게 한다.

프랑스 유학 시절 은사 신부님 중 한 분이 루게릭 병으로 돌아가셨다. 신부님의 마지막 힘겨운 싸움을 지켜보며, 조금씩 다가오는 죽음을 지켜보는 것만큼 고통스러운 것이 어디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 적이 있다. 그러나 신부님은, 남은 시간의 의미를 ‘사랑’과 ‘포기’에서 찾았다. 그신부님에게 포기란, 한편으로 병으로 인해 할 수 없는 것을 어쩔 수 없이 그만두는 것이었고, 다른 한편으로 알 수 없는 미래를 하느님께 내맡기는 것이기도 했다. 이 두 번째 포기는 인간을 향해 모든 것을 사랑으로 내어주신 하느님께 자신의 모든 것을 내맡기는 행위이기에, 앞으로 신부님의 남은 시간의 의미는 ‘사랑’이라고 하셨다. 그 사랑이 모든 것을 견디어 내고 언제까지나 스러지지 않는 사랑, 죽음보다 더 강한 사랑이기에, 신부님은 그 사랑에 대한 희망을 가슴에 품고 남은 시간을 꿋꿋이 끝까지 걸어갈 수 있었다. 엄습해 오는 죽음을 향해 조금씩 걸어가야 하는 고통스러운 시간일 수도 있는 남은 시간이, 신부님께는 본향을 향해 돌아가는 아름다운 순례길이 되었다.

옛 어르신들은 자신이 죽어서 입을 수의를 미리 꺼내 몇 번이고 펼쳐보고 다시 접으며, 죽음과 친숙해지는 지혜를 가지셨던 것 같다. 각자의 죽음과 친숙해지기 위해서라도, 주위에 죽음을 앞두고 힘겨운 나날을 살아가는 가족과 지인들을 방문하여 함께 있어 주며 그분들이 겪는 마음의 고통과 번민을 함께 나눌 수 있다면, 코로나19로 인해 침체된 우리네 일상이 조금 더 밝게 빛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한민택 수원가톨릭대학교 교무처장 겸 대학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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